July, 2018
Cover Story
"부르신 자리"
과학기술처 장관을 두 차례 역임하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산파 역할을 감당했으며 한국표준형 원자력발전소 탄생의 주역인 정근모 박사. 그의 삶이 곧 한국 과학계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가 남긴 족적은 눈부시다. 그럼에도 그가 한 일은 수없이 많은 선택의 순간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를 물은 게 전부라고 말한다. 부르신 자리에 순종으로 갔고 맡기신 은사로 최선을 다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초일류 대한민국 건설이라는 비전을 품고 그 누구보다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전히 심장이 뜨거운 그 사람, 정근모 박사를 만나 본다.
Q. 한국의 역사가 박사님의 삶과 어쩐지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토록 어려운 환경에서 어떻게 소명을 붙들게 되었는지요?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6학년 때 한국전쟁이 일어나서 부산으로 피난 가게 되었어요. 온 가족이 단칸방에서 지내는 와중에 저는 창고에서 공부해 국가시험(지금의 검정고시)을 치르고 경기중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국가시험을 치르던 그날은 지금도 또렷이 기억해요. 당시 어머니가 건강이 매우 위독한 상태였는데 그날 손수 연필을 깎아 주며 “이 연필로 시험을 보면 나중에 신문에 네 이름이 날 것이다” 하셨어요. 그런데 그게 제가 기억하는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이있어요. 시험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뒤였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어머니의 말씀은 마치 예언처럼 이뤄졌어요. 그로부터 2주 뒤 제 이름이 신문에 났거든요. ‘피난 중인 학생, 국가시험 전국 1등’이라는 제목으로요. 어머니는 제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왜 최선을 다해 공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신 분이에요.
경기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에 검정고시를 치러 서울대학교에 입학했어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고등학생 시절에 주니어 YMCA, 보이스카우트, 청소년 적십자(Junior Red Cross) 등 대외활동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성경 공부도 했죠. 그 시절에 제 삶의 이정표가 세워졌다고 생각하는데요, ‘공부가 목적인 삶이 아닌 진정으로 나누는 삶’을 지향하게 되었거든요. 학교에서 선생님의 가르침도 그랬고 대외활동으로 알게 된 삶의 태도도 그랬고 하나님의 말씀도 그랬죠. 개인의 영달이 아니라 나라의 미래를 위해 살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어린 제 가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어요.
--- 이후 내용은 2018년 07월호 잡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