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ideposts 2018 / 12
Cover Story
다림줄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면 무엇을 기준 삼아야 할까? 나일까, 남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세상일까? 아니다. 우리의 유일한 기준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기준으로 나를 비춰 봐야 내가 제대로 이해되고 앞으로 나아갈 길도 분명해진다. ‘내가 너희를 위해 죽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세상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기독교는 세상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그 때문에 감동이 된다. 성탄을 맞게 되는 12월, 불편하지만 감동이 되는 교회를 꿈꾸는 영락교회 김운성 목사를 만났다. 28년간 부산의 땅끝교회를 담임하다 올해 영락교회에 부임한 그에게서 하나님이 기준인 삶과 신앙을 배워 본다.
Q. 기독교에서 가장 큰 절기인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습니다. 성탄이 갖는 의미와 메시지를 들려주세요.
김운성 목사(이하생략):천사들이 전해 준 평화의 메시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누가복음 2:14)를 먼저 전하고 싶네요. 죄로 인해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가져온 용서와 화해, 평화의 메시지가 성탄에 담겨 있지요. 특히 남북 간에 평화의 무드가 짙어지는 요즘, 그럼에도 여전한 분단의 아픔을 종식시키는 평화의 메시지는 그 어느 때보다 특별하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은 하나님이 아들을 내어 주시면서 ‘내가 너희를 위해 죽을 수 있어서 감사하고 영광스럽다’라는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어요. 이는 ‘내가 남보다 많은 것을 차지해야 영광스럽다’는 세상의 이치와는 정반대되는 기독교의 가치관이에요. 따라서 성탄은 세상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도전적인 메시지를 가질 수밖에 없는 기독교를 대변하고 있어요.
Q. 6·25 때 아버지와 함께 평양에서 남한으로 오셨습니다. 신앙은 언제부터 갖게 되었는지요?
증조할머니가 평양신학교를 세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아 신앙생활을 시작한 후 온 가족이 믿음의 사람이 되었어요. 아버지는 6·25 때 어머니와 7남매를 북한에 둔 채로 저만 데리고 남한으로 내려왔어요. 분단 후 재혼하셨는데 어머니가 동생을 낳던 날 돌아가셔서 영락교회에서 장례를 치러 줬다고 해요. 저는 다섯 살까지 영락교회에 다니다가 영등포로 이사 온 후론 도림교회를 다녔어요. 어렸을 때는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죠. 성탄절에 올릴 연극에서 늘 요셉역을 맡았던 기억이 나네요.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국민학교(당시는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라고 했다―편집자 주) 때는 친구들이 갖고 놀던 새총에 맞아 홍채가 찢어질 정도로 눈을 다쳤어요. 영등포에서 신촌 세브란스병원까지 매일 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치료를 받아서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나중에 입대하려고 신체검사를 받아 보니 면제에 해당되는 수준이었더라구요. 그래도 볼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중학교 3학년 때는 온몸에 마비가 왔는데 서양 의학도 한방도 병명을 찾아내지 못해서 민간요법까지 동원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그러다 기도 많이 하는 권사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고쳐 주시면 목사가 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하라”고 해서 살고 싶은 마음에 그대로 따라 했고, 몇 주 후 조용기 목사님이 주도하는 환우 집회에 가서 기도를 받고 병이 나았어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능력이 제 몸에 흔적을 남긴 사건이에요.
하지만 목사가 되겠다고 서원한 것을 지키기까지도 우여곡절이 많았어요. 신학대학원 시험을 세 번 치렀는데, 한 번은 성경종합시험을 보던 중에 마음이 힘들어서 나왔고, 이듬해에는 합격했으나 군대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포기해야 했고요, 6개월 방위 복무를 마친 뒤에야 세 번째 도전해서 신대원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감사한 것은, 그렇게 어렵게 들어간 신학대학원 3년 과정을 영락교회의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공부했다는 거예요. 더구나 존경하는 한경직 목사님으로부터 격려와 위로를 받았다는 거예요. 영락교회 장학생들은 매년 정기적으로 한경직 목사님과 함께 식사 자리를 가졌는데요, 한번은 한경직 목사님이 손수 생선 가시를 발라 주셨어요. 당시 80세가 넘은 연세에도 한참 어린 제게 언제나 존댓말로 높이시고 덕담으로 격려해 주셨죠.
--- 이후 내용은 2018년 12월호 잡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