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붓으로 날다


Guideposts 2019 | 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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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으로 날다


Guideposts 2019 | 04


감전사고, 그리고 서예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석창우 화백은 중소기업의 전기관리자로 일하고 있었다. 둘째가 태어난 지 한 달 반이 지난 1984년 10월 29일, 2만 2900V의 고압 전류에 감전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고압 전류에 감전되면 대부분 사망에 이르고, 목숨을 건진다 하더라도 두 팔과 두 다리를 잃게 된다.


응급실에서 여러 번 수술을 했지만,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고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아내 곽해숙 씨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의사 선생님이 만날 때마다 남편은 죽는다고 말했어요. 중환자실에서 27일 동안 있었는데, 어떻게든 살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면회가 하루에 두 번밖에 안 되는데 의사 선생님께부탁해서 중환자실에 있는 남편을 간호했어요. 내 손길이 한 번이라고 더 닿으면 좋겠다 생각했거든요. 먹는 것도 고단백 위주로 먹이고,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습니다.”


아내의 노력 덕분이었을까, 석 화백은 깨어났다. 하지만 양팔과 발가락 두 개가 이미 절단된 상태였다. 일반병실로 옮기고도 1년 반 가까이 병원에 있었다. 그러는 동안 수술을 12번이나 했다. 그러고도 재활병원에서 회복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오매불망 그리던 집에 돌아왔으나 석 화백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불편해진 몸으로 일상을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자연히 위축되고 좌절이 되었다. 졸지에 가장이 되어 생활전선에 뛰어든 아내는 그런 석 화백에게 취미 생활을 하라고 독려했다. “보통 그런 일을 당하면 울고불고할 텐데 제 아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를 편안하게 해 줬지요. 아내 덕분에 크게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 아이가 그림을 그려 달라며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왔다. 아들이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사고를 당해서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는 게 늘 목구멍의 가시처럼 걸렸던 터라 그는 아이를 위해 하루 종일 참새와 동물들을 그렸다. 그런데 그의 그림은 그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리는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그리고 나면 작품이 되었다. 그때까지 몰랐던 재능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사고가 난 지 3년여 흐른 1988년 3월이었다.


그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본 처형이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라고 권했다. 하지만 양팔이 없는 그를 두 팔 벌려 환영해 주는 화실은 없었다. 다양한 물감을 충분히 사용하기 힘들 거라면서 다른 취미를 찾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회피할 뿐이었다. 그럴수록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석 화백은 그림과 관련된 것들을 찾다가 먹 하나만 사용하면 되는 사군자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만난 것이 여태명 스승이다.


“처음에 스승님도 고개를 저으며 반신반의하셨어요. 그때 제가 ‘저 스스로 포기할 때까지만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정말너무 힘들었어요. 갈고리로 붓을 잡는 것도 힘들었고, 발로 먹을 가는 것도 힘들었어요. 하지만 제겐 그것밖에 없었어요. 절대 포기할 수 없었죠.” 


아내가 집을 비웠기 때문에 석 화백을 돌보는 일은 아이들이 해야 했다. 아직어린 아이들에게 아빠를 도와주고 심부름하는 일은 버거웠다. 어느덧 아이들의 입에서 불평과 불만이 나왔다. 석 화백이 서예를 배우려고 전주에 내려간 사이 아내는 아이들에게 팔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장애 체험을 하게 했다. 그날 아이들은 팔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 그런 아이들에게 아내는 아빠의 삶을 이해할 것과 가족이 돕고 살아야 함을 가르쳤다. 그때부터 아이들의 불평이 쏙 들어갔다.

“제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내를 비롯해 가족들이 도와줬기 때문에 저는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하나님이 제게 주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수묵 크로키의 대가 


하루에 10시간씩 연습했다. 그렇게 3년이 흐르자 서예가 익숙해졌다. 그즈음 누드크로키 강의를 듣고 새로운 세계에 빠졌다. 생명의 특징을 포착해서 묘사하는 화법이 좋았다. 특히 멈춰 있는 포즈보다 포즈를 취하기 위해 움직이는 역동적인 동선을 좋아해서 집중해서 그렸다. 그러다 수묵화와 크로키를 접목해 보았다. 석 화백의 수묵 크로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처음엔 연필로 그리는 것이 익숙할 때까지 크로키 연습을 했어요. 그렇게 5년쯤 지나자 익숙해졌고 그때부터 붓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어요. 동양의 먹과 서양의 크로키를 접목하면 저만의 독창적인 작품이 나오겠다 싶었거든요.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이 그대로 나오는 게 신기했어요.” 석 화백은 크로키를 하면서 스포츠 선수들을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꾸준히 관찰하고 집중해서 관찰하자 각 선수들이 취하는 동작의 특징을 잡아낼 수 있게 됐다. 심지어 그 동작에 숨겨진 그들의 내면(감정의 변화)까지 포착할 수 있게 됐다. 그는 면밀히 관찰한 대상을 단 한 번의 붓질로 표현해 낸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일필휘지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석 화백의 수묵 크로키에서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느껴진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수묵 크로키의 대가’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개인전 41회, 그룹전 260여 회, 퍼포먼스 190여 회를 가졌고, 국내외 방송 출연도 100여 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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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내용은 2019년 4월호 잡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감전사고, 그리고 서예 


대학에서 전기공학을 전공한 석창우 화백은 중소기업의 전기관리자로 일하고 있었다. 둘째가 태어난 지 한 달 반이 지난 1984년 10월 29일, 2만 2900V의 고압 전류에 감전되는 사고가 일어났다. 그의 나이 30세였다. 고압 전류에 감전되면 대부분 사망에 이르고, 목숨을 건진다 하더라도 두 팔과 두 다리를 잃게 된다.


응급실에서 여러 번 수술을 했지만, 병원에서는 가망이 없다고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말했다. 아내 곽해숙 씨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의사 선생님이 만날 때마다 남편은 죽는다고 말했어요. 중환자실에서 27일 동안 있었는데, 어떻게든 살려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요. 면회가 하루에 두 번밖에 안 되는데 의사 선생님께부탁해서 중환자실에 있는 남편을 간호했어요. 내 손길이 한 번이라고 더 닿으면 좋겠다 생각했거든요. 먹는 것도 고단백 위주로 먹이고, 제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습니다.”


아내의 노력 덕분이었을까, 석 화백은 깨어났다. 하지만 양팔과 발가락 두 개가 이미 절단된 상태였다. 일반병실로 옮기고도 1년 반 가까이 병원에 있었다. 그러는 동안 수술을 12번이나 했다. 그러고도 재활병원에서 회복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오매불망 그리던 집에 돌아왔으나 석 화백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불편해진 몸으로 일상을 살아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자연히 위축되고 좌절이 되었다. 졸지에 가장이 되어 생활전선에 뛰어든 아내는 그런 석 화백에게 취미 생활을 하라고 독려했다. “보통 그런 일을 당하면 울고불고할 텐데 제 아내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저를 편안하게 해 줬지요. 아내 덕분에 크게 좌절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 아이가 그림을 그려 달라며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왔다. 아들이 태어난 지 한 달 만에 사고를 당해서 해 준 게 아무것도 없는 게 늘 목구멍의 가시처럼 걸렸던 터라 그는 아이를 위해 하루 종일 참새와 동물들을 그렸다. 그런데 그의 그림은 그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그리는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그리고 나면 작품이 되었다. 그때까지 몰랐던 재능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사고가 난 지 3년여 흐른 1988년 3월이었다.


그의 예술적 재능을 알아본 처형이 정식으로 그림을 배우라고 권했다. 하지만 양팔이 없는 그를 두 팔 벌려 환영해 주는 화실은 없었다. 다양한 물감을 충분히 사용하기 힘들 거라면서 다른 취미를 찾아보는 게 어떻겠냐고 회피할 뿐이었다. 그럴수록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석 화백은 그림과 관련된 것들을 찾다가 먹 하나만 사용하면 되는 사군자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때 만난 것이 여태명 스승이다.


“처음에 스승님도 고개를 저으며 반신반의하셨어요. 그때 제가 ‘저 스스로 포기할 때까지만이라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어요. 그런데 막상 시작하고 보니 정말너무 힘들었어요. 갈고리로 붓을 잡는 것도 힘들었고, 발로 먹을 가는 것도 힘들었어요. 하지만 제겐 그것밖에 없었어요. 절대 포기할 수 없었죠.” 


아내가 집을 비웠기 때문에 석 화백을 돌보는 일은 아이들이 해야 했다. 아직어린 아이들에게 아빠를 도와주고 심부름하는 일은 버거웠다. 어느덧 아이들의 입에서 불평과 불만이 나왔다. 석 화백이 서예를 배우려고 전주에 내려간 사이 아내는 아이들에게 팔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는 장애 체험을 하게 했다. 그날 아이들은 팔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고, 그런 아이들에게 아내는 아빠의 삶을 이해할 것과 가족이 돕고 살아야 함을 가르쳤다. 그때부터 아이들의 불평이 쏙 들어갔다.

“제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존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내를 비롯해 가족들이 도와줬기 때문에 저는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은 하나님이 제게 주신 특별한 선물입니다.”

수묵 크로키의 대가


하루에 10시간씩 연습했다. 그렇게 3년이 흐르자 서예가 익숙해졌다. 그즈음 누드크로키 강의를 듣고 새로운 세계에 빠졌다. 생명의 특징을 포착해서 묘사하는 화법이 좋았다. 특히 멈춰 있는 포즈보다 포즈를 취하기 위해 움직이는 역동적인 동선을 좋아해서 집중해서 그렸다. 그러다 수묵화와 크로키를 접목해 보았다. 석 화백의 수묵 크로키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처음엔 연필로 그리는 것이 익숙할 때까지 크로키 연습을 했어요. 그렇게 5년쯤 지나자 익숙해졌고 그때부터 붓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어요. 동양의 먹과 서양의 크로키를 접목하면 저만의 독창적인 작품이 나오겠다 싶었거든요.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이 그대로 나오는 게 신기했어요.” 석 화백은 크로키를 하면서 스포츠 선수들을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꾸준히 관찰하고 집중해서 관찰하자 각 선수들이 취하는 동작의 특징을 잡아낼 수 있게 됐다. 심지어 그 동작에 숨겨진 그들의 내면(감정의 변화)까지 포착할 수 있게 됐다. 그는 면밀히 관찰한 대상을 단 한 번의 붓질로 표현해 낸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일필휘지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감탄하게 된다. 그리고 석 화백의 수묵 크로키에서는 인생의 희로애락이 느껴진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수묵 크로키의 대가’라고 부른다. 지금까지 개인전 41회, 그룹전 260여 회, 퍼포먼스 190여 회를 가졌고, 국내외 방송 출연도 100여 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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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내용은 2019년 4월호 잡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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