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LONGER, LIVING BETTER


완벽한 레시피


Guideposts 2019 | 04


I sank down on an asphalt curb at the edge of the crowd—more than 500 contestants and their family and friends—at the 2017 World Food Championships, an international cooking competition. The day’s finalists for every category had been announced except for desserts, the one I’d made the mistake of entering. It was nearly 10 p.m. The adrenaline I’d been running on was gone. “It’s over,” I said to my husband, Jerry.

I didn’t belong here. I was an amateur home cook, not one of the real chefs competing all around me. I just

wanted to 1be done with it. I’d seen God work in other people’s lives. I’d thought maybe this was my turn. I was wrong. There’d always been part of me that thought my dreams, my life, didn’t really matter to God. Now I

knew.


I’d grown up in Mobile, Alabama, with an alcoholic mother who eventually abandoned us. She didn’t cook, so my father, a housepainter, did the best he could. Things were tough. Even my birthday, January 23, usually went

uncelebrated. Maybe that’s why I hated the number 23. Bad luck. I was the second oldest of four kids and wanted to help. I cooked simple dishes, like hamburger with peppers, onions and cheese. After dinner, I always had desserts—cookies and pies, cakes from a mix. “You’ve 2outdone yourself,” Daddy would tell me. Occasionally I would catch myself wondering if I could ever earn a living cooking.


Instead I married my high school sweetheart, Jerry. We moved to Montgomery, Alabama, where he’d gotten a job as an X-ray tech. We had a baby girl we named Carly. Five years later, I was pregnant again, this time

with twin boys.

A day after they were born, my doctor came to my bed. “Casey is doing great,” he said. “But I have bad news about your other son.”

Caleb was diagnosed with 3cerebral palsy. His left side was nearly paralyzed. 

The doctors didn’t think he would live. One night I prayed, “If you’re going to take him, take him now. I hate seeing him suffer.”


But Caleb slowly improved, undergoing 17 brain operations. My life was consumed with caring for him and giving him as normal a life as possible.

“Involve him when you’re cooking,” his 4speech therapist told me. “Name every ingredient. Describe each step. It’s a great way of stimulating his mind.”


인파 가장자리의 아스팔트 경계석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인파는 세계적 인 요리 경연 대회인 2017년 월드 푸드 챔피언십에 참가한 500명 이상의 도전자와 그들의 가족 그리고 친구들이었다. 내가 출전이라는 실수를 저지른 디저트를 제외한 각 분야의 결선 진출자가 발표되었다. 밤 10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날 계속 움직이게 해 준 아드레날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끝났어.”

남편 제리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추어 주부 요리사였고 사방에서 경쟁하는 진짜 요리사와는 다른 부류였다. 그저 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른 이들의 삶에서 애써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봤다. 이번은 내 차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틀렸다. 나의 일부는 언제나 내 꿈이나 삶이 하나님께 별일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이제 깨달았다.


나는 앨라배마주 모빌에서 자랐고 알코올중독자였던 어머니는 결국 우리를 버리고 떠났다. 어머니는 요리도 하지 않았기에주택 도장공이던 아버지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했다.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1월 23일인 내 생일도 대개는 축하하는 일 없이 지나갔다. 그래서 숫자 23을 싫어했을 거다. 재수가 없었다. 네 명의 형제자매 중 둘째였던 나는 도움이 되고 싶었다. 피망, 양파, 치즈를 넣은 햄버거같이 간단한 요리를 만들었다. 저녁식사 후에는 언제나 믹스 가루로 만든 쿠키, 파이, 케이크 같은 디저트를 냈다.

“굉장히 잘했구나.”

아빠의 말이었다. 때때로 요리로 생계를 꾸릴 수 있지 않을까 궁리하는 내 모습을 문득 깨닫곤 했다.


대신에 고교 시절의 남자친구였던 제리와 결혼했다. 우리는 남편이 엑스레이 기사로 일하게 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로 이사했다. 딸이 생겼고 칼리라고 이름을 지어 줬다. 5년 후에 다시 임신했는데, 아들 쌍둥이였다.

쌍둥이가 태어난 다음 날, 의사가 내 침대로 다가왔다.

“케이시는 아주 좋아요. 하지만 다른 아이에게는 안 좋은 소식이 있어요.”

칼렙은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다. 아들의 몸 왼쪽이 거의 마비되었다. 의사들도 아들이 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밤 기도했다.

“칼렙을 데려가실 거라면 지금 데려가세요. 아이가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아들은 뇌 수술을 17차례나 받으며 천천히 좋아졌다. 칼렙이 가능한 한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돌보느라 내 삶을 다 바쳤다.

“요리할 때 칼렙을 참여시키세요. 모든 재료의 이름을 말하고 각 단계를 설명하세요. 머리에 자극을 주는 좋은 방법이랍니다.” 아들의 언어치료사가 말했다.


...

이후 내용은 2019년 4월호 잡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우편 보내실 곳

[03727]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대문 우체국
사서함 1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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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sank down on an asphalt curb at the edge of the crowd—more than 500 contestants and their family and friends—at the 2017 World Food Championships, an international cooking competition. The day’s finalists for every category had been announced except for desserts, the one I’d made the mistake of entering. It was nearly 10 p.m. The adrenaline I’d been running on was gone. “It’s over,” I said to my husband, Jerry.

I didn’t belong here. I was an amateur home cook, not one of the real chefs competing all around me. I just

wanted to 1be done with it. I’d seen God work in other people’s lives. I’d thought maybe this was my turn. I was wrong. There’d always been part of me that thought my dreams, my life, didn’t really matter to God. Now I

knew.


I’d grown up in Mobile, Alabama, with an alcoholic mother who eventually abandoned us. She didn’t cook, so my father, a housepainter, did the best he could. Things were tough. Even my birthday, January 23, usually went

uncelebrated. Maybe that’s why I hated the number 23. Bad luck. I was the second oldest of four kids and wanted to help. I cooked simple dishes, like hamburger with peppers, onions and cheese. After dinner, I always had desserts—cookies and pies, cakes from a mix. “You’ve 2outdone yourself,” Daddy would tell me. Occasionally I would catch myself wondering if I could ever earn a living cooking.


Instead I married my high school sweetheart, Jerry. We moved to Montgomery, Alabama, where he’d gotten a job as an X-ray tech. We had a baby girl we named Carly. Five years later, I was pregnant again, this time

with twin boys.

A day after they were born, my doctor came to my bed. “Casey is doing great,” he said. “But I have bad news about your other son.”

Caleb was diagnosed with 3cerebral palsy. His left side was nearly paralyzed. 

The doctors didn’t think he would live. One night I prayed, “If you’re going to take him, take him now. I hate seeing him suffer.”


But Caleb slowly improved, undergoing 17 brain operations. My life was consumed with caring for him and giving him as normal a life as possible.

“Involve him when you’re cooking,” his 4speech therapist told me. “Name every ingredient. Describe each step. It’s a great way of stimulating his mind.”


인파 가장자리의 아스팔트 경계석에 맥없이 주저앉았다. 인파는 세계적 인 요리 경연 대회인 2017년 월드 푸드 챔피언십에 참가한 500명 이상의 도전자와 그들의 가족 그리고 친구들이었다. 내가 출전이라는 실수를 저지른 디저트를 제외한 각 분야의 결선 진출자가 발표되었다. 밤 10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날 계속 움직이게 해 준 아드레날린도 남아 있지 않았다.

“끝났어.”

남편 제리에게 말했다. 나는 여기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추어 주부 요리사였고 사방에서 경쟁하는 진짜 요리사와는 다른 부류였다. 그저 다 그만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른 이들의 삶에서 애써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봤다. 이번은 내 차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틀렸다. 나의 일부는 언제나 내 꿈이나 삶이 하나님께 별일 아니라고 생각해 왔다. 이제 깨달았다.


나는 앨라배마주 모빌에서 자랐고 알코올중독자였던 어머니는 결국 우리를 버리고 떠났다. 어머니는 요리도 하지 않았기에주택 도장공이던 아버지가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최선을 다했다.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1월 23일인 내 생일도 대개는 축하하는 일 없이 지나갔다. 그래서 숫자 23을 싫어했을 거다. 재수가 없었다. 네 명의 형제자매 중 둘째였던 나는 도움이 되고 싶었다. 피망, 양파, 치즈를 넣은 햄버거같이 간단한 요리를 만들었다. 저녁식사 후에는 언제나 믹스 가루로 만든 쿠키, 파이, 케이크 같은 디저트를 냈다.

“굉장히 잘했구나.”

아빠의 말이었다. 때때로 요리로 생계를 꾸릴 수 있지 않을까 궁리하는 내 모습을 문득 깨닫곤 했다.


대신에 고교 시절의 남자친구였던 제리와 결혼했다. 우리는 남편이 엑스레이 기사로 일하게 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로 이사했다. 딸이 생겼고 칼리라고 이름을 지어 줬다. 5년 후에 다시 임신했는데, 아들 쌍둥이였다.

쌍둥이가 태어난 다음 날, 의사가 내 침대로 다가왔다.

“케이시는 아주 좋아요. 하지만 다른 아이에게는 안 좋은 소식이 있어요.”

칼렙은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다. 아들의 몸 왼쪽이 거의 마비되었다. 의사들도 아들이 살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밤 기도했다.

“칼렙을 데려가실 거라면 지금 데려가세요. 아이가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아들은 뇌 수술을 17차례나 받으며 천천히 좋아졌다. 칼렙이 가능한 한 평범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돌보느라 내 삶을 다 바쳤다.

“요리할 때 칼렙을 참여시키세요. 모든 재료의 이름을 말하고 각 단계를 설명하세요. 머리에 자극을 주는 좋은 방법이랍니다.” 아들의 언어치료사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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