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ideposts 2019 | 06

A New You

out from the shadows
소통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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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deposts 2019 | 06


I thought my depression was a failure of my faith,

something to be hidden, even from God

KEVIN CURRY Dallas, Texas


나는 신앙심이 신실하지 못해서 우울증이 찾아왔다고 믿었다.

그래서 하나님께도 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케빈 커리 텍사스주 댈러스

I’d known her since middle school. That’s why I’d felt comfortable inviting myself over to her place that night. “Just thought we could catch up,” I’d told her, which wasn’t exactly true.

I had just picked out my hair, so my twists were a bit longer than usual; when wet they would hang nearly over my eyes. I flashed a big disarming smile. “I’m great,” I said. “Got some big projects coming up at work.”

Also, not exactly true. I was 28, a year out of Harvard’s Kennedy School of Government, working in city government on a yearlong fellowship. To my family and friends, I was on the fast track. But inside I was tormented by dark, self-destructive thoughts I’d wrestled with since I was a kid. I was at least 30 pounds overweight. My latest girlfriend had essentially dumped me, saying she was “just moving on.” Not that I could blame her. My whole life, I’d kept everyone at arm’s length, never revealing the real me, making it hard to get close.

I’d been taught that my 1depression came from a lack of faith. Another way I was falling short. It made me angry at God. Why wouldn’t he help me? I’d decided to take matters in my own hands. This last get-together with my old friend was fitting. I only hoped, when it was all over, she and others would be able to forgive me, to understand that I could no longer live with the torment.

My dad had been the GM of a large automobile plant in Dallas. It provided a comfortable life for my mom and older brother, Chris, and me. My mom showed her love through her cooking: Southern favorites like fried catfish and cheese grits, and Cajun dishes from her Louisiana roots. A clean plate was both polite and 2customary.

We attended one of the city’s largest churches. Our minister preached that God poured out his blessings on the faithful. The evidence was all around us. We lived in a nice house. Chris and I went to a private school.

Then, when I was eight, my dad was diagnosed with a 3debilitating disease and went on permanent disability. My mom began working two jobs. And Chris and I were sent to public school, where I struggled to fit in from Day One.

The other kids made fun of my voice and the words I used. My dad was an English major, so at home he’d correct me and my brother if we got lax. My inability to code-switch at school made me an easy target. But by then, I was already a master actor. I could laugh and joke my way through the day while


3

그 친구와는 중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 그날 밤 친구 집에 가겠다고 했을 때 마음이 편안했다.

“그냥 회포나 풀까 해서.”

사실이 아니었지만 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다. 최근에 꼰 머리는 평소보다 길어서 물에 젖으면 눈을 거의 덮을 정도로 내려왔다. 나는 친구를 안심시키기 위해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주 잘 지내고 있어. 직장에서 곧 큰 프로젝트도 맡을 거고.”

내가 말했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도 사실이 아니었다.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행정대학원을 졸업한 지 1년이 된 당시 스물여덟 살이던 나는 1년짜리 연구원 자격으로 시 정부에서 일하고 있었다. 가족과 친구들이 보기에 굉장히 빠른 속도로 자리를 잡은 셈이었다. 하지만 정작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씨름해 온 어둡고 자기 파괴적인 생각들에 사로잡혀 고문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몸무게는 정상 체중에서 못해도 13kg은 초과했고, 최근 결별한 여자 친구는 ‘그냥 변화를 주고 싶어서’라는 이유로 일방적으로 이별을 고했다. 여자 친구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 내 본 모습을 철저히 숨기며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나란 사람과 가까워지는 일이 힘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는 신앙심이 부족해서 우울증 같은 병에 걸리는 거라고 배웠다. 이 부분에서도 나는 한참 모자랐다. 그런 이유로 나는 하나님께 화가 났다. 주님 어찌 저를 버리시나이까? 결국 내 문제는 내가 해결하기로 마음먹었다. 옛 친구와 마지막으로 만나는 일은 괜찮은 생각이었다. 모든 게 끝나면 그 친구를 포함해 나를 아는 모든 사람이 나를 용서해 주기를, 고문당하는 기분으로는 더는 살 수 없던 나를 이해해 주기를 바랐다.

아버지가 댈러스에 있는 자동차 공장의 총책임자로 근무한 덕에 어머니와 형 크리스, 나는 풍족하게 살 수 있었다. 어머니는 음식으로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분이었다. 남부에서 즐겨 먹는 메기 튀김과 치즈 그릿츠(말린 옥수수를 굵직하게 빻아서 만든 그릿츠에 우유와 치즈를 넣어 만든 미국 남부 아침 식사 요리―역주), 어머니의 고향 루이지애나에 뿌리를 둔 케이준 음식들(미국 남부 전통 음식의 일종―역주). 접시를 깨끗이 비우는 것이 예의이자 관습이었다.

우리 가족은 시내의 대형 교회 중 한 곳에 다녔다. 목사님은 신실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총이 쏟아진다고 설교했다. 그 증거는 차고 넘쳤다. 우리는 좋은 집에 살았고 형과 나는 사립 학교에 다녔으니까.

내가 여덟 살 때 심각한 병에 걸린 아버지는 점점 몸이 쇠약해지더니 결국 평생 장애를 가지게 되었다. 어머니는 직장을 두 군데씩 다니기 시작했고, 형과 나는 공립 학교로 전학을 갔다. 등교 첫날부터 나는 험난한 하루를 보냈다.

아이들은 내 목소리와 내가 사용하는 단어들을 가지고 나를 놀렸다.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한 아버지는 나와 형이 정확하지 않은 언어를 사용하면 바르게 고쳐 주곤 했는

feeling I might 4implode at any moment.

I’d go home and straight to my room, filling notebooks with my 5angst. I hate that I’m so different. I’m always sad inside. Why can’t I rest?

In high school I found relief in an art class. There was one character I drew over and over again. A young black man in a T-shirt and blue jeans, whose 6dreads covered his face. I drew him in various fatal scenes. Lying in a pool of blood. Even hanging. I didn’t think of him as me. For one thing, my head was a shaved, clean college cut.

One day my dad found my drawings. All he could ask was, “What’s wrong?” My mother just sobbed.

I was ashamed and embarrassed. There was no talk of going to a therapist or a psychiatrist. In the black and church communities, there wasn’t much discussion about mental health. You were supposed to “go to God and lay it on the altar.” Only problem: I didn’t exactly know what to lay down, so I just repeatedly asked God to “make me feel better and not sad.” Between Dad being in and out of hospitals and Mom working to keep everything together, I didn’t want to be a bigger burden. I tried to live in the shadows.

I excelled at academics. I got a bachelor’s degree in business. Then Harvard for grad school. Boston is where things changed for me. The pressure to succeed was intense. And the cold, dark weather awakened something that had largely been 7dormant and 8contained—my depression. I started drinking almost every night. Then the 2008 stock market crash sent me right back to the place I thought I had escaped, 9literally and 10figuratively.

I’d been home with my parents for a year. My job wasn’t what I’d thought it would be. I felt stuck. I wasn’t sleeping. 11In desperation, I went to a Christian therapist; I saw her three times. Nothing changed, and our conversations were just on the surface. I’d skipped the past two appointments. I doubted she even Soon enough that weekend, the torment, would be over. I’d even drawn lines on my arm to guide the razor blade. This get-together with my old friend was one of the last things on my list.


데, 재빨리 태세 전환을 하지 못한 나를 아이들은 놀려먹기에 만만한 상대로 여겼다. 하지만 그때쯤 나는 이미 능수능란한 연기자가 되어 학교에서는 나를 웃음 재료로 삼아 농담도 곧잘 했지만, 속으로는 언제고 폭발할 것 같은 기분으로 하루하루 버텼다.

집에 오면 곧장 방으로 들어가 이런 불안과 고뇌들을 노트에 적어 내려갔다.

‘나는 왜 남과 다르지? 이런 내가 너무 싫어.’ ‘내 안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어.’ ‘난 왜 편히 쉴 수 없는 거지?’

고등학교 시절, 미술 수업 시간에 기분 전환 거리를 하나 발견했다. 한 인물을 그리고 또 그렸는데, 얼굴은 여러 가닥으로 꼰 머리로 뒤덮여 있고 티셔츠와 청바지를 입은 젊은 흑인 남자였다. 나는 남자가 피 웅덩이에 누워 있다든지 심지어 목을 매는 장면까지 잔인한 장면들만 그렸다. 하지만 그 남자와 나를 동일시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나는 대학생 스타일로 깔끔하게 머리를 깎았으니까.

어느 날, 아버지한테 그 그림들을 들키고 말았다.

“너 도대체 왜 이러니?”

그림을 보고 아버지가 겨우 한 말이었다. 어머니는 흐느끼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창피하고 당황스럽긴 했지만 심리 상담사나 정신과 전문의를 찾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흑인 교회 사회에서 정신 건강에 대한 이야기는 공개적으로 하지 않았고, 대신 ‘하나님께 가서 솔직하게 말씀드려야’ 한다고만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정확히 무슨 말씀을 드려야 할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저 하나님께 ‘제 기분이 좀 더 좋아지게 만들어 주시고 슬퍼하지 않도록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했다. 아버지는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고, 어머니는 힘들게 일하면서 가정을 돌봤기 때문에 그분들에게 더 큰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가급적 그림자처럼 조용히 살려고 애썼다.

공부를 잘했던 나는 경영학 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한 후 하버드 대학원에 들어가 학업을 이어 갔다. 보스턴에서의 생활은 나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성공에 대한 중압감이 엄청났고, 게다가 춥고 음산한 날씨까지 더해져 그동안 억눌린 채 잠복해 있던 무언가가 깨어났다. 바로 우울증이었다. 거의 매일 밤 술로 마음을 달랬다. 2008년 주식 시장이 붕괴되었을 때, 나는 문자 그대로 그리고 비유적 의미에서 내가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결국 집으로 돌아와 1년 동안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하던 일도 내가 생각한 것과 달랐다. 마음이 답답하고 잠도 잘 수가 없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독교 심리 치료사를 찾아갔다. 하지만 세 번을 만났는데도 변한 건 아무것도 없고 대화는 겉돌기만 했다. 두 번이나 연속으로 상담에 가지 않았지만 치료사가 신경이나 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말이 되면 이 지긋지긋한 고문도 끝날 것이다. 나는 팔 위에 면도날이 지나갈 자리를 따라 미리 선을 그려 놓았다. 옛 친구와의 만남은 마지막에 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

이후 내용은 2019년 6월호 잡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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