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uideposts 2019 | 07
FAITH AND LIVING
A Message for Leah
귀를 열면 들린다
FAITH AND LIVING
A Message for Leah
귀를 열면 들린다
Guideposts 2019 | 07
I believed God wanted my little girl to get better.
I just needed to hear it
DEVON STILL Houston, Texas
나는 주님께서 내 어린 딸이 좋아지기를 바라고 계신다고 믿었다.
그리고 내게 필요한 것은 실제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데본 스틸 텍사스주 휴스턴
I’m a person of faith, though there have been times I’ve felt disconnected from God. Like when injuries threatened to derail my NFL career. I’d remember what my grandma told me when she was dragging me to church as a kid back in Wilmington, Delaware. “The good Lord speaks to all of us, Devon, but you’re never going to hear him if you don’t open your ears and listen.” I grew up and joined a church of my own, and while I felt closer to God, it still seemed as if I was doing all the talking.
나는 신앙심이 신실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따금 하나님과 단절된 기분을 느낄 때가 있다. 부상으로 프로 미식축구 선수로서의 생명이 위태로웠던 때처럼.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보낸 어린 시절, 할머니가 나를 억지로 교회에 끌고 가시면서 했던 말씀이 떠오른다.
“선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신단다, 데본. 헌데 네가 귀를 닫고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 말씀이 들리지 않을 거야.”
성인이 되어 혼자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과 조금 더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지 만 여전히 이야기하는 사람은 나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I tried not to take it personally—until Leah, my sweet four-year-old daughter, got sick with cancer. I really needed to hear directly from him then.
Leah had to undergo four grueling rounds of a combined radiation/chemo treatment. People around the world, moved by the story of a pro football player fighting to help his critically ill daughter, were praying for her. It wasn’t enough. The doctors said she needed surgery. Our last best hope. The night before her operation, I’d never seen her so scared. I couldn’t comfort her. I was as scared as she was.
“Are they going to cut me with a real knife?” she asked, her voice trembling.
God, what do I tell her? What do I say to ease her fear?
I didn’t expect an answer, not like my grandma used to get. To hear her tell it, the Almighty talked to her in a booming Old Testament voice, one there was no mistaking. I was never going to have that kind of relationship with God. I knew I owed everything to him. Still, was it too much to ask for some actual spoken words?
When I was growing up in Wilmington, my parents weren’t churchgoers. Then they divorced, and in fifth grade I started acting out, stealing money from my school counselor and buying pizzas with it. Long story short, my mother found out what I was doing. (Mothers always find out.) She told my grandma, and for a few months I went to the Baptist church with her every Sunday. She’d taken me to church before, but this time I knew I was being punished. I refused to listen to a word the preacher said. Until he got to the prayer part, the idea that God could get you out of a jam—that was what got my attention. I needed all the help I could get. I foresaw many jams in my future.
That’s where football became my salvation. I was a defensive lineman. By junior year of high school, I was six foot five—and fast. Football felt like what
하지만 애써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던 중 네 살 난 내 사랑스러운 딸 리아가 암 판정을 받았다. 그때만큼 하나님의 목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 적은 없는 것 같다.
리아는 네 차례에 걸쳐 끔찍하게 고통스러운 방사선 치료와 화학 요법 치료를 받았다. 생사를 오가는 병에 걸린 딸을 살리기 위해 처절하게 싸우는 프로 미식축구 선수 이야기에 감동을 받은 전 세계 사람들이 리아를 위해 기도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마지막 희망이었다. 수술 전날 밤, 나는 아이가 그토록 겁에 질린 모습을 처음으로 보았다. 그런 아이를 안심시킬 수가 없었다. 아이만큼 나도 겁에 질려 있었으니까.
“아빠, 의사 선생님들이 진짜 칼로 저를 잘라요?”
떨리는 목소리로 리아가 물었다.
‘하나님,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 줘야 하나요? 아이를 안심시킬 수 있는 말을 알려 주세요.’
하나님의 응답을 들으셨던 할머니와 달리 나에게도 응답이 올 거란 기대는 없었다. 할머니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구약성서에 묘사된 것처럼 우렛소리와 같은 목소리로 당신에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착각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나는 하나님과 결코 그런 관계를 맺지 못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 모든 것을 빚지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고 싶은 게 그렇게 큰 욕심일까?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교회에 다니지 않았다. 그러다 5학년 때 내가 말썽을 부리기 시작했고 학교 상담사 선생님의 돈을 훔쳐 피자를 사 먹었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알게 되었다. 이야기가 길지만 요약하자면, 내가 밖에서 무슨 짓을 하며 돌아다니고 있는지 어머니가 결국 알아내셨다(어머니들은 뭐든 ‘항상’ 알아내는 법이다). 할머니께 이 사실을 말씀드렸고, 이후 몇 달 동안 나는 매주 주일 할머니를 따라 침례교회에 나가야 했다. 전에도 나를 데려가신 적이 있지만 이번엔 벌로 가는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는 목사님의 설교를 듣지 않으려고 기를 썼다. 그러다 기도하는 부분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은 궁지에 몰린 자를 구해 주신다는 말씀이 내 귀를 사로잡았다. 나는 가능한 많은 도움이 필요했다. 앞으로 내 인생에 수많은 곤경이 닥칠 것만 같았다.
I was meant to do. But football is punishing. I was always getting hurt. At Penn State, where I got a scholarship, I was injured my entire freshman and most of my sophomore years. An operation on my leg left me with a scar six inches long. I prayed a lot over that, though sometimes I wondered why God would bother with me. I’d done some questionable things, such as getting a woman pregnant in my junior year. That’s how Leah had come into the picture. God had turned the biggest mistake of my life into a precious gift. I’d been crazy about her from Day One. Her mother and I had tried to make it work, but we were so young. But I vowed to always be there for Leah.
I was drafted by the Cincinnati Bengals. That’s how I met Asha. She was the best thing to happen to me since football. She made me want to be a better person. Way better. A friend had invited her to a party before I left for Bengals training camp. We’d kept a long-distance relationship going for two years now. She loved Leah as much as I did.
But the injuries and 6setbacks kept coming. Eight games into my rookie season, I was benched for the year when a veteran returned from injuries. My second year, I 7dislocated my elbow and missed four games. Then in December 2013, playing against the Pittsburgh Steelers, I strained my back. By that night, I couldn’t walk. Again, I needed surgery. The pain was 8unrelenting. An ultrasound revealed three blood clots in my lungs. “You’ll never play football again,” the doctor said.
“Why does everything keep going wrong?” I asked Asha. I was practically in tears.
“Maybe you need to have a real relationship with God,” she said. “Not just a help-me-out-of-a-jam one.”
We joined a Pentecostal church. Man, they prayed hard there. And they welcomed Asha and me with open arms. For the first time, I understood the
이런 나를 구원해 준 것이 바로 미식축구였다. 포지션은 수비수였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내 키는 2m 가까이 컸고 빠르고 민첩했다. 미식축구를 위해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늘 부상을 달고 살아야 하는 극도로 힘든 운동이었다. 장학금을 받고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에 들어갔지만 1학년 내내, 그리고 2학년의 대부분을 부상에 시달려야 했다. 수술을 받은 다리에는 15cm가량의 흉터 자국이 남았다. 그 시절 나는 기도를 많이 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나 같은 놈에게 신경을 써 주실 이유가 없다는 생각도 했다. 나는 떳떳하지 못한 행동도 더러 했다. 3학년 때 한 여자를 임신시킨 일도 그중 하나다. 그런 경위로 리아가 내 삶에 들어왔다. 하나님께서는 내 인생 최대 실수를 귀중한 선물로 바꿔 나에게 선사하셨다. 태어난 그 순간부터 나는 리아에게 푹 빠져 버렸다. 리아의 엄마와 나는 어떻게든 리아를 키워 보려고 애썼지만, 우리도 너무 어린 나이였다. 그럼에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리아의 곁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나는 신시내티 벵골스에 선발되었다. 그 계기로 아샤를 만났다. 아샤를 만난 것은 미식축구 다음으로 내 인생 최고의 사건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나는 더 좋은 사람, 훨씬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벵골스의 훈련 캠프로 떠나기 전 친구가 한 파티에 아샤를 초대했다. 우리는 2년 동안 장거리 연애를 했다. 그녀는 나만큼이나 리아를 사랑했다.
하지만 부상과 곤란한 문제들이 계속해서 내 발목을 잡았다. 선배 선수가 부상에서 회복해 경기에 복귀하자 신인 선수로 여덟 경기를 뛰던 나는 1년 동안 벤치를 지켜야 했다. 2년째에는 팔꿈치 탈구로 네 경기를 쉬어야 했고, 2013년 12월 피츠버그 스틸러스와의 경기 도중에는 허리 염좌 증세가 나타났다. 그날 밤 걸을 수도 없을 정도로 심각했다. 이번에도 수술을 받아야 했다. 통증은 무자비했다. 설상가상으로 초음파 검사 결과 폐 세 군데에서 혈전이 발견되었다.
“앞으로 미식축구는 할 수 없을 겁니다.” 의사가 말했다.
“왜 모든 일이 이렇게 안 풀리는 걸까요?” 나는 눈물을 흘리며 아샤에게 물었다.
“어쩌면 그저 곤경에 빠진 당신을 도와달라고만 하지 말고 하나님과 진정한 관계를 맺으라는 신호일지도 몰라요.”
아샤가 말했다.
importance of a church community. A team that always has your back. A month after we started going, I went back to the doctor. The blood clots were gone. All those prayers, said by people who barely knew me. I knew I’d been led there. That April, Asha and I got baptized. Finally it felt as if my life had turned a corner.
Two months later, in June, Leah was diagnosed with a mass growing in her abdomen. Stage IV neuroblastoma. Right there in the hospital waiting room, I fell to my knees. I’d never taken a hit that hard playing football. My head was spinning. And I felt a flash of anger. What did God want from me? Then I thought of the people at church, their incredible support. I was going to need them more than ever. But more than ever, I craved that one-on-one connection to God. His voice booming in my ears. As it had for my grandmother.
The treatment required Leah to spend five days in the hospital, then 21 days recovering, each round. There were critically ill children all around me. I couldn’t ignore the hurt these other families were going through. One day Leah and I went to the hospital’s children’s playroom. There was a girl there maybe eight years old, doing a puzzle while attached to a chemo drip. Her single mother was working. This girl had no one there for her. And she was not the only one suffering. Another family was fighting to take their dying daughter home, but their community had no hospice program. The hospital wouldn’t agree to it. There were families with financial worries. Babies only months old with cancer.
I wanted to help them. I reached out to some journalists I knew. Within days, it seemed as if the whole country was talking about Leah and about the hardships that families of children with cancer face. I started posting pictures and regular updates on my Instagram account, mainly as a way to cheer up Leah. In a week, I had tens of thousands of followers. Then half a million. Thousands of messages of support every day.
우리는 오순절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그곳 신도들은 아주 열렬히 기도했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을 진심으로 환영해 주었다. 나는 처음으로 교회 공동체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교회 공동체는 나를 항상 지지해 주는 든든한 팀이었다. 교회에 다닌 지 한 달이 되었을 무렵 다시 병원을 찾았을 때 혈전은 보이지 않았다. 나를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의 그 모든 기도 덕분이었다. 나는 운명적으로 그곳에 이끌려 갔다. 그해 4월, 아샤와 나는 세례를 받았다. 마침내 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은 기분이었다.
두 달 후 6월, 리아의 복부에서 종양이 발견되었다. 신경아세포종 4기였다. 병원 대기실에 있던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미식축구를 하면서도 그토록 강력한 타격을 입은 적은 없었다. 머리가 빙빙 돌았다. 그러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나님은 도대체 나한테 뭘 원하시는 거지? 문득 교회 사람들과 그들이 나에게 보낸 격려와 응원이 떠올랐다.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그들이 필요했다. 동시에 그 어느 때보다 더 하나님과의 교감이 필요했다. 할머니가 그랬듯이 하나님의 음성이 내 귀에 울리기를 간절히 바랐다.
항암 치료는 5일 동안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은 후 21일 동안 회복기를 가지는 패턴으로 진행되었다. 주위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는 아이들로 넘쳐 났다. 나는 환자의 가족들이 겪을지도 모르는 고통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어느 날 리아를 데리고 병원 놀이방에 갔을 때 여덟 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항암 링거를 달고 혼자 퍼즐 놀이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 없이 혼자 딸을 키우는 아이의 엄마는 일하느라 아이 곁에 있을 수 없었다. 여자아이는 돌봐줄 가족도 없이 혼자였다. 그 아이처럼 고통받고 있는 사람이 수없이 많았다. 어떤 가족은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딸을 집에 데려가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병원 측은 동네에 호스피스 프로그램이 없다는 이유로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경제적 문제로 고통받는 가족들. 세상에 나오자마자 암과 사투를 벌이는 어린 생명들.
그들을 돕고 싶어 내가 아는 기자 몇몇에게 도움을 청했다. 며칠이나 되었을까, 온 나라가 리아와 소아암 환자 가족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후 리아를 응원할 목적으로 정기적으로 사진을 올리고 있던 인스타그램의 팔로워 수가 일주일 만에 수만 명으로 늘더니 급기야 50만 명까지 치솟았다. 응원 메시지가 매일 수 천 개씩 올라왔다.
I read them to Leah. “I can’t believe all these people are praying for me,” she said, giggling. “I’m a star!”
By August, I had to be at training camp. My coaches let me skip a couple days each week to go home to be with her, but it killed me being away from Leah. She was losing weight, looking more sickly. I called her every chance I got, sometimes sneaking out of team meetings. A week before our 11season opener, my coach called me into his office. “You’re being cut,” he said. “I’m sorry. You’re just not focused enough.” They offered me a position on the practice squad. It would be far less money, but I’d be able to keep my health insurance. The newspapers wrote about that too. Big-time. A week later, I was back on the team when a spot opened up.
The Bengals announced they were selling jerseys with my number—75—for $100 each, with all proceeds going to Cincinnati Children’s Hospital. By week’s end, they’d sold more than $400,000 worth of jerseys.
Sitting on the edge of Leah’s bed, the night before her operation, none of that mattered. God, a little help here? Nothing. The room was deathly silent. Finally I opened my mouth.
“You know, I’ve been through a lot of surgeries, and I’m fine. If surgery hurt me, would I be able to play football?”
“No,” Leah said. “But are they really going to cut me? With a knife?”
I pulled up my pant leg, pointing to that six-inch scar. “The doctors had to cut my leg open and put screws inside. I didn’t feel a thing. They gave me medicine that let me sleep through it, just like they will you.”
“So it’s not that scary?” Leah said.
“No, baby. It’s a good thing.”
“I want the cancer out of me,” she said. “And God wants it too. He told me.”
“You talk to God?” I said.
나는 리아에게 메시지들을 읽어 주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정말 절 위해 기도하고 있는 거예요? 저 이제 스타예요!”
아이가 웃으며 말했다.
8월에는 훈련 캠프가 있었다. 코치들은 일주일에 이틀은 집에서 아이와 시간을 보내라며 나를 배려해 주었지만 리아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 자체가 괴로웠다. 아이의 몸무게는 점점 줄고 있었고 병색도 더 짙어졌다. 나는 틈나는 대로 아이와 통화했다. 가끔 전체 모임 자리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오기도 했다. 그러던 중 시즌 첫 경기를 일주일 앞두고 코치가 사무실로 나를 불렀다.
“미안한 말이지만 자네 앞으로 주전으로는 못 뛸 것 같네. 집중력이 많이 떨어졌더군.”
대신 예비 선수단 자리를 제안했다. 연봉은 훨씬 적었지만 건강보험은 유지할 수 있었다. 신문들도 이 일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일주일 후, 예비 선수단에 자리가 나오자 다시 팀에 합류했다.
벵골스는 등번호 ‘75’가 적힌 내 유니폼을 한 장에 100달러에 판매하고, 수익금 전액은 신시내티 아동 병원에 기부겠다고 발표했다. 그 주 주말까지 모인 수익금은 40만 달러가 넘었다.
수술 전날 밤, 리아의 침대 옆에 앉아 있던 내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병실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마침내 나는 입을 열었다.
“있잖아, 아빠도 수술 많이 받아 봤는데 괜찮아. 수술이 그렇게 아팠다면 아빠가 경기에 뛸 수 있었을까?”
“아니요. 그렇지만 정말로 의사 선생님들이 저를 자를까요? 진짜 칼로?”
나는 바지를 걷어 올려 긴 흉터를 가리켰다.
“의사 선생님들이 아빠 다리를 잘라서 여기 안에 나사를 넣었단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았어. 아빠가 수술을 받는 동안 잠을 잘 수 있도록 약을 주었거든. 리아한테도 그렇게 할 거야.”
“그럼 안 무서워요?” 리아가 말했다.
“안 무섭지. 리아한테 좋은 거야.”
“He tells me he believes in me,” my little girl said, “and no matter what I go through, he says, ‘Be strong.’”
“He said all that to you?”
“Yeah,” she said. “God talks in all different ways, right?”
Slowly I nodded, trying to process everything I was hearing. I thought of all the people who had 12lifted me up over the years: my family, fans, coaches, church family, all the prayers they’d said for me, the people I’d met at the hospital, the hundreds of thousands of folks who had responded to Leah’s story, the money we’d raised, the strength I’d gotten from Asha…and Leah. Beautiful Leah. 13From the mouths of babes. My entire life God had been talking to me, in ways I just hadn’t been hearing.
“That’s right, baby,” I said, softly rubbing Leah’s back. She was lying down. Minutes later, she was fast asleep.
It’s been five years since Leah had that surgery. She’s been in 14remission since 2015. In fact, she was the flower girl when Asha and I got married. I no longer play football. I meet with groups across the country as an advocate for children with cancer, talking to people about overcoming life’s challenges. And encouraging them to listen for the voice that’s always there, as long as we’re listening.
“제 몸에서 암이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하나님도 그걸 원하세요. 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셨거든요.”
“하나님하고 이야기를 했어?” 내가 물었다.
“하나님께서 저를 믿는다고 하셨어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강해져야 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어요.”
어린 딸이 그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정말 너한테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이지?”
“네. 하나님께서는 그때그때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세요. 그렇죠?”
아이가 한 말을 곱씹으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를 일으켜 세운 사람들이 하나하나 스쳐 갔다. 가족, 팬, 코치, 교회 가족, 그리고 그들이 나를 위해 해 준 그 모든 기도, 병원에서 만난 사람들, 리아의 이야기를 듣고 격려와 응원을 보내 준 수십만 명의 사람들, 우리가 모금한 돈, 아샤에게서 받은 기운… 그리고 내 딸 리아. 아름다운 리아. 아이답지 않게 똑똑한 말을 하는 리아. 평생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말씀을 하고 계셨는데 내가 귀 기울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단다, 아가야.”
리아의 등을 어루만지며 내가 말했다. 침대에 누운 아이는 몇 분 뒤 이내 잠이 들었다.
리아가 수술을 받은 지 5년이 흘렀다. 2015년 이후로 리아의 병세는 차도를 보였다. 아샤와 내가 결혼할 때 화동 역할도 훌륭히 수행했다. 나는 미식축구를 그만두고 전국의 단체들과 접촉해 소아암 환자들의 실상을 알리는 한편, 고난을 극복한 경험을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은 항상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니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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