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라


Guideposts 2019 |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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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곳'에 그물을 내려라 


Guideposts 2019 | 08


43세, 늦은 나이에 예수님을 믿고 30년 가까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이가 있다. ㈜반도이앤씨 회장, 참포도나무병원 이사장이자 한국기독실업인회(이하 한국CBMC) 중앙회장인 이승율 회장이 바로 그다. 이 회장은 그의 삶이 예수님을 믿기 전과 믿은 후로 뚜렷이 나뉜다고 말한다.

예수님을 믿은 뒤 그는 매 순간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 안에 있다는 것과 때를 따라 도우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낀단다. 이 회장은 한국CBMC 회원으로서 지난 26년간 중국 옌지,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등 해외 각지 지회 창립을 주도하며 CBMC 선교 사역 벨트를 개척했다. 그리고 실업인으로서 그는 옌벤과학기술대학교와 평양과학기술대학교 설립에 참여해 소외된 지역의 다음 세대를 양육하는 데 이바지했다. 이제는 서울·평양올림픽 개최를 위해 헌신하고 싶다는 이승율 회장, 그가 주님의 음성에 순종해 그물을 던진 ‘깊은 곳’을 따라가 본다.

CBMC(기독실업인회)가 어떤 곳인지 말씀해 주세요.


이승율 회장(이하 생략) : CBMC(기독실업인회)는 세계경제대공황이 시작된 1930년 미국 시카고에서 일곱 명의 크리스천 실업인이 모여 최초의 모임을 가지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1931년 1월 시카고 개릭(Garrick) 극장에서 6주간 지역 영적 부흥을 위한 전도집회를 가졌고, 첫 전도집회 때부터 800석의 극장을 가득 채우는 성황을 이뤘습니다. 이 집회는 6주를 넘어 6개월, 1년 그리고 1956년까지 26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1937년 샌프란시스코, 시애틀을 비롯한 미국 대도시에 동시다발로 결성된 실업인 모임이 연대하여 CBMC를 공식 태동시켰습니다.

2016년 현재 실업인회는 81개국에 조직되어 있으며 미국 애리조나주 투손시(Tucson)에 국제CBMC 본부가 있습니다.


그럼 한국CBMC는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요? 현재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요?


한국CBMC는 1951년 한국전쟁 중에 처음 소개되었습니다. 미 군사고문단(KMAG) 일원으로 참전한 세실 힐(Cecil Hill) 대령이 민의원이자 기독공보 부사장인 황성수 박사에게 CBMC를 소개해 1952년 7월 21일 <기독공보>에 게재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CBMC 창립일을 1952년 7월 21일로 정하고 대구와 경주 지역 기독실업인 신우회를 중심으로 CBMC가 처음 조직되었고, 이후 부산, 서울, 수원 등에 CBMC가 세워져 국제본부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게 되었습니다. 1967년 국가 단위로서 한국CBMC를 설립하고 국제본부와의 소통을 단일화했습니다.


이렇듯 역경 속에서 태어난 한국CBMC는 여러 측면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기독실업인은 통합과 일치의 특징이 있습니다. 기독교 내에 찬송가를 하나로 통합했고,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대형 전도대회에도 기초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국가조찬기도회도 오랫동안 주관했고, 경제 부흥 운동을 비롯해 사회 전반에 끼친 영향도 매우 큽니다. 현재 국내에는 300개에 가까운 지회가 있고, 31개의 연합회가 있으며, 중앙회가 있습니다. 해외에도 140~150개 있습니다.

한국CBMC는 매주 1회 ‘성경공부 및 기도회’ 형태로 조찬 모임을 갖고 있으며, 7500여 명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주력하는 사역은 ‘4wheels system management’로 지회 창립 육성, 재생산자 교육 스쿨(비전스쿨, 리더십스쿨, 마스터스쿨, 패밀리스쿨), 차세대 창업, 여성 CEO 포럼 등입니다. CBMC는 실업인과 전문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구주이심을 증거하고 주님의 지상명령을 성취하는 국제적 사명 공동체입니다. ‘비즈니스 세계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한다’를 비전으로 전도와 양육, 리더십 개발, 일터 변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 회장님께서 교회에 나가신 게 40대라고 들었습니다.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제가 마흔셋이 돼서야 교회에 나갔습니다. 아내를 고1 때 만났는데, 그때부터 아내가 전도하고 장모되시는 김종경 권사님도 강권했지만, 25년이 지나서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 12월 중순이었습니다. 저녁 늦게 집에 들어갔는데 세 아이가 제 앞에 무릎을 꿇더니 신년에는 어디에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매년 신년 초에 아내는 기도원에, 아이들과 저는 스키장에 갔거든요. 스키장에 가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더니 큰아이가 스키장도 좋지만 이번에는 기도원에 가자고

하는 겁니다. 왠지 그 말이 싫지 않아서 그러자고 약속을 해 버렸지요. 그리고 신년이 되어 기도원에 갔습니다. 아내랑 약속한 것이었으면 핑계를 대고 가지 않았을 텐데, 아이들하고 약속한 것이라서 어쩔 수 없었죠.

경기도 파주에 있는 기도원이었는데 매년 2박 3일간 신년축복성회가 열렸지요. 둘째 날, 쉬는 시간에 어느 장로님에게 우리가 묵고 있던 성전의 이름이 ‘실로암 성전’이라서 실로암이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실로암’이라고 하니까 무슨 암자

같아서 물어본 것인데, 그분이 성경을 펼쳐서 예수님을 만난 맹인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험한 비탈길을 기어서 내려갔을 맹인의 고통이 느껴졌고, 실로암 못에서 눈을 씻고 마침내 눈을 떴을 때 언덕 위 예수님을 보고 느꼈을 감격과 환희가 그대로 내 마음에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파우스트가 목숨을 걸고 진리를 탐구하다 좌절하는 마지막 순간, 구원의 여인 그레첸의 손에 이끌려 하늘로 올라간 것처럼 저도 ‘저 밑바닥에서 벽공으로’ 들림 받는 듯했습니다.

그 순간 영혼의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열기와 함께 울음이 터져 나왔습니다.

해탈의 감정과 부활의 기쁨을 동시에 맛보며 저는 그날 이후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다음 주일부터 교회에 나가서 지금까지 오직 한 길, 한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2018년에 CBMC 중앙회 18대 회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CBMC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요?


1992년 6월, 대전 유성에서 우연히 만난 골프 멤버들의 초대를 받아 CBMC 전도초청 만찬행사에 갔다가 평소 알고 지내던 양익환 CBMC 서울영동지회 부회장이 저를 CBMC 회원으로 적극 추천해 주었습니다. 그날 김동호 목사님이 ‘공부해서 남 주자, 돈 벌어서 남 주자, 출세해서 남 주자’라는 메시지의 설교를 하셨는데, 그 말씀에 감동을 받아 이후 서울영동지회에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1994년 8월 1일 중국 최초로 한인CBMC가 결성됐는데, 이때 저는 총무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당시 저는 중국 옌볜과학기술대학교 건설 감독을 맡아 한국과 중국을 수시로 오갔는데 이때 중국에 온 사업가들과 여러 가지 고충을 함께 나누고 기도를 하다가 결성된 것이었습니다. 이 모임이 발전해서 옌지CBMC를 시작으로 칭다오, 베이징, 톈진, 선양, 상하이 6개 지역을 직접 뛰어다니면서 창립을 주도했습니다. 나머지는 자발적으로 우후죽순 생겨났지요. 창립이 결정되면 한국CBMC중앙회에 연락해 국내 지회와 자매결연을 맺어 주었습니다. 2010년엔 중국에 설립된 한인CBMC가 60여 개나 됐습니다. 조선족 기업인으로 구성된 조선족 지회가 10여 개, 중국인 사업가로 구성된 한족 기독단체도 10여 개 생겼습니다. 중국 전역에 90개 가까운 기독실업인 단체가 창립된 것입니다.


이런 활동은 중앙아시아로까지 뻗어 나가 2000년엔 카자흐스탄의 중심 도시인 알마티와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 2001년엔 터키 이스탄불에 CBMC가 설립되었습니다.

2001년 이스탄불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뜻밖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항공사 잡지를 보면 뒤쪽에 세계지도가 있는데, 그날따라 그 지도를 펼쳐서 보다가 한순간 눈앞에 ‘10/40 창’이 떠올랐습니다. ‘10/40 창’이란 미전도 종족의 95%, 세계 빈민의 84%가 살고 있는 북위 10도와 40도 사이의 지역을 말합니다. 아시아 동쪽 끝 도시 옌지로부터 서쪽으로 선양, 베이징, 우루무치, 알마티, 타슈켄트, 그리고 아시아 대륙의 서쪽 끝 이스탄불에 이르는 지역으로 그날 이 지역들이 ‘하나의 길’로 이어져 보였습니다. 순간 하나님께서 ‘CBMC 실크로드’ 사역의 길을 인도하셨다는 감동이 절로 터져 나왔습니다. CBMC 선교사역 벨트를 이룬 것입니다. 이후에 중국 시안(2002년), 베트남 호치민(2003년), 우루무치(2005년),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2012)까지 CBMC가 이어졌습니다.


중국 옌볜과학기술대학과 평양과학기술대학 설립에 참여했다고 들었습니다.

중국이나 북한에 특별한 소명이 있었나요?


중국이나 북한에 대한 열정이 남다르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섭리로 참여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 신년 초부터 교회에 나갔는데, 그해 10월 초 베이징 아시안게임이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중국 산둥성 칭다오에 골프장 사업을 위해서 오가던 때였습니다. 당시 중국에는 골프장이 베이징과 상하이에 일본인들이 운영하던 두 곳뿐이었습니다. 중국과 곧 수교한다는 소식을 듣고 골프장을 선점하면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농민들 토지보상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가주석 양상쿤의 아들 양샤오밍을 만나러 베이징의 한 호텔에 갔습니다. 그런데 다른 분과도 약속되어 있다기에 제가 양보를 하고 옆 자리에서 기다리며 그들의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다른 분의 이야기가 제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내용은 미국 시민권자인 이분이 재산을 팔아 옌지에 기술전문대학을 하나 세워 중국을 돕고 우리 동족을 깨우치는 일에

봉사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분이 바로 김진경 옌볜과학기술대학 설립자 이자 총장님입니다.

저는 그분의 말을 들으며 제가 참 부끄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돈벌이 때문에 온 것이고, 그분은 자신의 유익이 아닌 공공의 유익을 위해 온 것 이었습니다. 돈벌이가 부끄러운 것은 아니지만 제겐 그분과 같은 꿈이 없다는 게 부끄러웠습니다. 서울에 돌아온 뒤에도 그 마음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있는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왜 살고 있는가.’ 2주 후에 서울에 출장 온 김 총장님을 찾아가 상의한 끝에 저도 대학 설립에 동참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옌볜과학기술대학이 평양과학기술대학까지 이어졌습니다.


옌볜과학기술대학이 소위 일류 대학으로 성장하기까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요?


1992년 9월 16일 중국 지린성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주도 옌지시에 2년제 옌변조선족기술전문대학이 문을 열었습니다. 이듬해 4년제로 승격하면서 교명은 옌볜과학기술대학(YUST)으로 바뀌었습니다. 옌볜과학기술대학교는 흔히 ‘기적의 동산’이라고 불립니다. 학교 부지는 원래 공동묘지 자리였는데, 저는 매번 언덕을 올라갈 때마다 엘리사 선지자를 생각합니다. ‘물 근원’으로 올라가 소금을 뿌려 쓴물을 단물로 바꾼 엘리사의 기적처럼, 옌볜과학기술대학교는 ‘죽음의 땅’이 ‘생명의 땅’으로 변화한 역사적인 곳입니다. 학생들은 조선족 80%, 한족 17%, 고려인과 소수민족 3%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학부와 부속 과정을 포함한 졸업생이 2만 2천여 명 됩니다. 졸업생들은 한국어, 중국어, 영어 3개 국어에 능통합니다. 컴퓨터를 잘 다루고 13개국에서 온 교수들에게 배우다 보니 국제 감각도 뛰어납니다. 중국 100대 중점 대학 중 하나로, 신입생 1차 선발대학에 지정된, 속칭 일류대학입니다. 이렇게까지 급성장한 데는 무보수 자원봉사로 기꺼이 참여한 교수들의 공로가 큽니다. 교수진은 한국은 물론이고 미국, 뉴질랜드, 호주, 영국, 캐나다, 독일 등에서 온 외국인 교수까지 250명에 달합니다.

폐허로 남아 있던 화장터 시설을 개조하여 ‘대학 교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있긴 하지만 교정과 강의실에서 공식적으로 성경을 읽거나 찬송가를 부르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학생들은 졸업할 때쯤 대부분 거듭납니다. 어느 학생은 자기 고향으로 가서 간증을 했는데 그 후 동네 전체가 변화된 일도 있습니다.


...

이후 내용은 2019년 8월호 잡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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