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3 Names
세 개의 이름을 새기고
Guideposts 2019 | 10
Special Issue
세 개의 이름을 새기고
Guideposts 2019 | 10
The IED blew up in an instant. For this Marine, its effects reverberated for years
MICAH HERNDON Tallmadge, Ohio
IED는 순식간에 폭발했다. 이 해병대원에게 그로 인한 여파는 수년간 지속되었다.
마이카 헌돈 오하이오주 톨마지
You probably saw pictures of me all over social media this past April. I’m the dude who literally crawled across the finish line of the Boston Marathon. I was totally gassed. But nothing on earth was going to keep me from finishing, because it wasn’t just me. My left running shoe had the names of three comrades in Afghanistan whose lives had been destroyed by an IED.
“Adapt and overcome” was pounded into us in the Marines. I had to push through. I got down on my hands and knees and crawled to the finish line. For Ballard. For Hamer. For Juarez.
올해 4월 독자 여러분은 각종 사회 관계망 서비스를 장식한 내 사진을 보았을지도 모르겠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의 결승선을 문자 그대로 기어서 통과한 장본인이 바로 나인 것이다. 완전히 녹초가 되었지만 도중에 그만두는 것은 나답지 않은 행동이기에 멈출 수가 없었다. 내 왼쪽 운동화에는 아프가니스탄에서 IED 폭발로 목숨을 잃은 전우 세 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우리 해병은 ‘적응하고 극복하라’고 세뇌되다시피 훈련을 받았다. 나는 ‘해내야만 했다’. 그래서 엉금엉금 기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결승선을 통과하고 싶었다. 밸라드를 위해. 해머를 위해. 그리고 후아레즈를 위해.
Running had never been a thing with me. I had to do it in basic, and I took it up again only at a low point, after returning to civilian life. Fighting overseas, I had been in charge of multimillion-dollar equipment and entrusted with the lives of fellow Marines. But back home in Ohio, I couldn’t get anyone to hire me. Finally I applied for work as an electrician and learned the trade. But my self-esteem was shot. Nothing was the same. My marriage fell apart, and my wife and I divorced. I was tortured by survivor’s guilt. Those guys who had died over there—couldn’t I have saved them somehow?
I had enlisted in 2007, after one semester at Hiram College and one at Kent State. School wasn’t really doing it for me, and the idea of signing up for the military was appealing to me, sacrificing oneself for something bigger. I’d played football and basketball in high school and was in good shape. I figured boot camp at Parris Island would be a breeze. But I soon discovered that the real discipline for a Marine was mental. Learning how to tough things out. To be tougher than the enemy.
That mind-set came in handy when I was deployed. I was a machine gunner with the First Battalion, Third Marines—the Lava Dogs. I did two deployments, first in Iraq, then in Afghanistan. We did about 400 missions
altogether. My mom wasn’t crazy about me signing up for the military and had given me a silver charm to keep in my flak jacket, a little angel with wings. I hung it on a piece of cord when I sat up there in the gun turret.
January 9, 2010. Afghanistan, deep in Taliban territory. I was worried about fellow Marines Mark Juarez and Matthew Ballard and the British journalist who was embedded with us, Rupert Hamer. I was the lead machine gunner and the first squad leader, in charge of six other gunners. Our staff sergeant knew I had a lot of experience and had asked me where we should put everybody in the convoy. I placed myself in the first vehicle, which was usually the most dangerous position, the one most likely to hit an IED.
나는 달리기에 별로 소질이 없었다. 민간인으로 복귀한 뒤에는 초보 수준에서 기초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해외 전투에서 수십억에 달하는 무기를 관리 감독하고 해병대 전우들의 생명을 지키는 중책을 맡았던 나였지만, 고향 오하이오주로 돌아오자 나를 고용하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전기 기술자 자리에 지원해 일을 배울 수 있었다. 하지만 내 자존감은 바닥을 쳤다. 모든 것이 예전 같지 않았다. 결혼 생활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부부는 결혼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나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으로 고문과도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곳에서 전사한 병사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들을 구할 방법이 없었던 것일까?
나는 하이럼 대학교와 켄트 주립대학교에서 각각 한 학기를 마치고 2007년에 입대했다. 대학 생활은 나와 잘 맞지 않았다. 대신 더 큰 목적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다는 점에 끌려 군에 입대하기로 결심했다. 고등학교 시절 미식축구와 농구를 해서 체력은 아주 좋았다. 파리 아일랜드(Paris Island)에서 받는 신병 훈련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하지만 해병 훈련은 정신력 단련이라는 사실을 이내 깨닫게 되었다. 참고 견디는 것. 적군보다 더 강인할 것.
파병되었을 때 정신력 훈련은 효력을 발휘했다. 나는 제1대대 3해병대 ‘라바도그(Lava Dogs)’의 기관총 사수로 보직을 받았다. 처음에 이라크, 이후 아프가니스탄으로 파병되었고, 총 400건의 작전을 수행했다. 입대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어머니는 방탄조끼에 넣고 다니라며 은으로 만든 장식물 하나를 건네셨다. 날개가 달린 조그마한 천사 모양의 장식물이었다. 나는 포탑에 앉아 있을 때면 그것을 전선에 매달아 두었다.
2010년 1월 9일, 우리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영토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동료 해병대원인 마크 후아레즈와 매튜 밸라드, 우리 대대에 파견된 영국인 기자, 그리고 루퍼트 해머가 걱정되었다. 당시 나는 선두 기관총 사수이자 여섯 명의 사수를 책임지는 분대 지휘관이었다. 하사들이 내가 경험이 많다는 것을 알고 병사들을 수송대의 어떤 차량에 배치해야 할지 물었다. 나는 IED의 공격을 가장 먼저 받기 때문에 가장 위험한 첫 번째 차량에 탑승했다.
밸라드와 나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미국에 있는 그의 아내가 아들의 출산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큰 위험에 노출되지 않기를 바랐다. 후아레즈와 해머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그들도 조국에 가족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안전할 거라
Ballard and I had become good friends. He was expecting a son back in the States—I didn’t want him to be at as much risk. I didn’t know Juarez and Hamer as well, but I knew they had families back home. I put the three of them in the last vehicle, where I figured they’d be safer.
IED stands for “Improvised Explosive Device,” also called Improvised Expletive Device. You’re constantly on the lookout for them. I mean all the time. And it’s still not good enough. Our convoy was hauling supplies, journalists and fellow Marines between bases. It was early in the day when we hit that deadly 400-pound IED. It didn’t explode under the first truck—the one I was in. Instead it exploded under the last vehicle. Hamer and Juarez were killed instantly. Ballard was thrown from the turret and landed on the ground, both legs shattered. There was screaming and blood and debris everywhere.
Instantly we reverted to our training. We created a 360-degree safe zone around the convoy so Ballard could be medevaced out and the bodies of Hamer and Juarez could be airlifted out. We who remained stayed focused.
Once the casualties were taken care of, we had to move on. We had to complete our mission. All the while I asked myself, Why hadn’t I seen that bomb? Could we have avoided it?
Later on during that deployment in Afghanistan, I hit two more IEDs and survived both. The first one didn’t go off. It had been wired wrong. We were lucky, really lucky. Yet deep down a part of me wondered if I didn’t deserve to be blown up too.
The second one was a powerful 50-pound bomb. The blast knocked me out, my ears ringing, but I wasn’t bleeding anywhere. I still had my arms and legs.
We had music playing in the truck that day, and somehow the iPod survived the blast. The song I heard while the doctor was checking my vitals was Sarah McLachlan’s “Angel.”
The Marines wanted to medevac me out, but I knew if that happened I
생각한 마지막 차량에 세 사람을 배치했다.
‘IED’는 ‘Improvised Explosive Device’(급조 폭발물로 임의로 폭발 물질을 조달하여 만들어 낸 사제 폭탄을 말한다―역주)’를 나타내는 말이지만, 우리는 그것을 Improvised ‘Expletive’ Device(직역하면 급조된 ‘욕설 유발’ 장치물이라는 뜻으로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급조 폭발물의 특징을 빗댄 언어 유희―역주)라고도 불렀다. 언제 어디서든 이 IED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 수송 차량은 보급품, 기자들, 해병대원들을 다른 기지로 수송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중이었다. 180kg에 달하는 치명적인 IED가 터진 것은 그날 이른 아침이었다. 내가 타고 있던 선두 차량이 지나갈 때는 잠잠했던 폭탄이 마지막 차량이 지나갈 때 폭발했다. 해머와 후아레즈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밸라드는 포탑에서 튕겨 나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그의 두 다리는 산산조각났다. 비명 소리와 피와 잔해가 사방에 흩어졌다.
우리는 신속하게 훈련 매뉴얼대로 움직였다. 밸라드는 부상자 수송 헬기로, 해머와 후아레즈의 시신은 항공 수송할 수 있도록 수송대 주변으로 360도 안전지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집중력을 최대한 발휘해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사상자가 후송되어야 우리도 움직일 수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해야 했다. 그렇게 있는 내내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폭탄을 왜 못 본 거야? 피할 수 있었던 거 아냐?’
이후 아프가니스탄 파병 기간 동안 IED의 공격을 두 번이나 더 받았고, 두 번 다 살아남았다. 첫 번째는 전선 연결에 문제가 있었는지 폭발하지 않았다. 운이 정말 좋았다. 그야말로 천운이었다. 하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내가 살아남을 자격이 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두 번째는 강력한 22kg짜리였다. 이때는 나도 나가떨어졌다. 하지만 양쪽 귀만 울릴뿐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팔과 다리도 멀쩡했다. 당시 트럭에 음악을 틀어 놓았는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아이팟(iPod)도 멀쩡했다. 의사가 내 몸의 주요 장기들의 상태를 확인하고 있을 때 사라 맥라클란(Sarah McLachlan)의 노래 ‘천사(Angel)’가 흘러나왔다.
대원들은 나를 헬기로 수송하고자 했으나, 그렇게 가 버리면 대원들이 있는 소대로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주둔지로 돌아가지 않고 기지에 남았다. 대신 일주일동안 작전에 나가지 않고 쉬면서 생각을 정리하기로 했다. 설상가상으로 그 주에 우리 기지는 박격포 공격을 한 차례 더 받았다. 폭발과 비명소리가 늘었고 기지는 파괴되었다.
wouldn’t be able to return to my buddies in the platoon. I would have been sent back to my duty station. Instead I stayed at the base and didn’t go on any missions for a week, trying to clear my head. We got mortared on the base that same week. More explosions, more screams, more destruction.
I was honorably discharged after four years. I had served my time and served my country. It was when I was back home in Ohio that the survivor’s guilt hit me big-time. Here I was, safe, close to family and friends. But I didn’t feel safe, wracked by memories, horrible nightmares waking me up at night. I loved my wife, Sarah. I didn’t know why we couldn’t keep our marriage together. I was a mess inside, as if a bomb had gone off inside my soul.
It was then, living by myself, that I took up running. I’d heard that you could get this runner’s high when you increased the mileage, and I needed something to take me out of myself, something to release me from my
feelings. I’d put those men in the last vehicle. I’d chosen the spot where two of them would die instantly. For months I’d held out hope for Ballard. He made it to Walter Reed and endured multiple surgeries to repair his shattered legs.
He came home to be with his wife and son. But things went bad for him. The pain was so intense; the painkillers were too many to count. He died of a heart attack.
I ran outdoors under groves of trees along Ohio’s Freedom Trail. I thought of Ballard, Hamer, Juarez. Three names. I knew those guys were in heaven—they’d done their best. I wanted to do my best for them here on earth. I started this habit of praying their names as I ran. Every day running a little further, a little faster, staying close to them.
Inhale— “Ballard”—exhale. Inhale—“Hamer”—exhale. Inhale—“Juarez”—exhale.S
Someone suggested I run a half-marathon. I did it
4년 후, 나는 명예롭게 제대했다. 군 복무를 했고, 국가를 위해 헌신했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이 나를 고문하던 시기는 고향 오하이오로 돌아오고 난 뒤였다. 나는 안전한 이곳으로 돌아와 가족과 친구들 곁에 있다. 하지만 과거의 기억들 때문에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밤에는 끔찍한 악몽으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내 사라를 사랑했지만 결혼 생활을 어떻게 이어 나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마치 내 영혼이 폭격을 맞은 것처럼 마음이 황폐해져만 갔다.
아내와 이혼한 후 달리기를 시작했다. 오래 달리면 러너스 하이(runner’s high, 장시간 달린 후 고통이 정점을 찍을 때 갑자기 찾아오는 짜릿한 쾌감이나 도취감―역주)의 경지를 맛볼 수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 자신으로부터, 내 감정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뭔가가 필요했다. 전우들을 마지막 차량에 배치한 장본인이 바로 나다. 두 대원이 즉사할 장소를 내 손으로 지정한 것이다. 몇 달 동안 밸라드에게 희망을 걸었다. 그는 월터리드 육군의료센터로 후송되어 산산조각난 다리를 고치기 위해 여러 번에 걸친 수술을 견뎌냈다. 그리고 아내와 아들 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예후가 좋지 않았다. 극심한 통증
때문에 진통제를 과다 복용했고, 이로 인한 심장마비로 그마저 세상을 떠났다.
나는 울창한 나무들이 늘어선 오하이오 프리덤 트레일(Freedom Trail)을 따라 달렸다.
밸라드와 해머, 그리고 후아레즈를 생각했다. 세 개의 이름. 그들은 천국에 있을 것이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다. 나는 여기 지상에서 그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달리는 동안 그들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습관이 생겼다. 매일 조금 더 멀리, 더 빨리 달려 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숨을 들이쉬고, ‘밸라드’, 내쉬고. 숨을 들이쉬고, ‘해머’, 내쉬고. 숨을 들이쉬고, ‘후아레즈’, 내쉬고.
하프 마라톤에 도전해 보라는 누군가의 권유로 캔턴(오하이오주 북동부에 위치한 도시―
in Canton. Then a marathon. I did that in Canton too, fueled more by guilt than anything else. My work was going well. I ended up being hired as a substation electrician for FirstEnergy Ohio Edison. If only this sense of responsibility for my comrades’ deaths would leave me. It was the thing I could not outrun.
Sarah and I started talking again, slowly rebuilding the trust between us. In 2017, we remarried. She could see the change in me since I’d taken up running, the healing that was going on. That I was trying. The guilt was never completely gone, but I had a way to fight it. And I felt as if I was doing something to honor my fallen comrades.
It was Sarah’s idea, putting their names on my shoes. By the time I was running the Boston Marathon, we had the good news that we were expecting our first child.
I wouldn’t have scripted it the way it turned out, crawling to the finish line.
What an inglorious end for a Marine. Some people saw that shot of me on my hands and knees and thought maybe I’d just knelt down to thank God. Well, I wouldn’t have crawled to do that. But I did say a prayer for 26 miles with every inhale and exhale. Ballard. Hamer. Juarez. Those guys felt very near. I’ll run in their memory forever.
When that bomb went off, I too was injured, a moral injury that tore into my soul, throwing off all sorts of spiritual shrapnel. I feel as if I am trying to put my soul together with every mile I run, outpacing the guilt that exploded that day on the battlefield. Every mile I run draws me closer to God.
역주)에서 열린 대회에 참가했다. 이후 역시 캔턴에서 열린 마라톤 풀코스에도 참가했다.
다른 그 어떤 것보다 죄책감은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일도 잘 풀려 ‘퍼스트에너지 오하이오 에디슨(FirstEnergy Ohio Edison)’의 변전소 전기 기술자로 채용되었다. 전우들의 죽음에 대한이 책임감만 떨쳐버릴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도저히 앞지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사라와 나는 다시 대화를 시작했다. 서서히 신뢰가 회복되어, 우리는 2017년에 재혼했다. 그녀는 달리기를 시작한 후로 내가 변화하는 모습을, 점점 치유되는 모습을 보았다. 내가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주었다. 죄책감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 것과 맞서 싸우는 방법은 알고 있었다. 달리기는 전사한 전우들을 기리는 일종의 의식처럼 느껴졌다.
신발에 세 사람의 이름을 새기는 것은 사라의 아이디어였다. 내가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할 즈음 우리에게 기쁜 소식이 생겼다. 아내가 첫아이를 임신한 것이다.
나라면 결승선까지 기어 들어오는 장면은 절대 각본에 넣지 않을 것이다. 해병대원에게 이 얼마나 불명예스러운 결말인가? 내가 기어가는 사진을 본 일부 사람들은 신께 감사드리기 위해 무릎을 꿇은 줄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땅에 엎드려 기어가는 자세를 취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42.195km를 달리는 동안 모든 들숨과 날숨에 그들의 이름을 불렀다. 밸라드. 해머. 후아레즈. 그렇게 하면 그들이 내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들을 기억하며 영원히 달릴 것이다.
폭탄이 터졌을 때 나 또한 부상을 당했다. 그것은 일종의 도덕심에 난 상처였다. 내 영혼은 갈기갈기 찢겼고 온갖 영적인 파편들이 사방에 튀었다. 달리기를 하는 동안 찢긴 영혼이 봉합되면서 그날 전장에서 폭발했던 죄책감을 앞질러 가는 기분이 들었다.
달리는 거리가 1km씩 늘어갈 때마다 하나님과의 거리도 더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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