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Known to Me
거울이 보여준 것
Guideposts 2020 | 03
Special Issue
Guideposts 2020 | 03
거울이 보여 준 것
Her crossover success in pop music has been compared to Amy Grant’s. But it didn’t come without a struggle
기독교 음악과 대중음악을 넘나드는 그녀의 성공은 에이미 그랜트와 비견될 만하다. 하지만 결코 쉬운 길은 아니었다.
BY LAUREN DAIGLE, Nashville, Tennessee
로런 데이글 테네시주 내슈빌
I was 15 when I got sick, really sick. At first everybody thought it was mono. All I wanted to do was sleep. All I could do was sleep. No going to school, no seeing my friends, just lying in bed or on the sofa in front of the TV.
My mom’s a teacher. She was gone all day. So were my older brother and younger sister. Dad worked in pharmaceutical sales and would come home to fix me lunch.
내가 아프기 시작한 것은 열다섯 살 때였다. 정말 죽을 만큼 아팠다. 처음에는 다들 단핵구증(엡스타인바 바이러스에 의해 주로 젊은 성인에게 나타나는 급성 열성 질환. 고열, 목앓이, 림프샘과 비장의 비대 증상을 보임―역주)을 의심했다. 그냥 잠만 자고 싶었다. 어차피 잠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학교도 못 가고 친구들도 못 만나고 온종일 침대나 소파에 누워 TV만 봤다. 선생님이던 엄마는 하루 종일 집에 안 계셨고, 오빠와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제약회사 영업 일을 하던 아빠가 집에 잠깐 들러 내 점심을 차려 주셨다.
“Maybe I should quit my job to take care of you,” Mom said. I told her that would be ridiculous. Why stay home just to watch me sleep?
I figured I’d get better. Get back to a normal life. Go to school, hang with my friends, listen to music. Instead I got worse. I was so exhausted that I couldn’t even lift the remote to change the TV channel. My parents took me to doctor after doctor, specialist after specialist. The doctors asked me a million questions and did a million tests. In the end, they said it was a disease called cytomegalovirus—a nasty, stronger cousin of mono—that can attack the liver and other organs.
The doctors told me to rest. Which was all I could do anyway. I dragged myself around the house, wishing I could be someone else, somewhere else. My old self. Calling friends, doing homework, staying up late, singing in the choir—just singing, period. That was the worst. I was too weak to sing.
Why was this happening? Would I be like this for the rest of my life? What kind of life would that be? No life at all. Yet I just couldn’t imagine ever feeling better again. At 15, it felt as if my life were over. My dreams were just a joke. I sank deeper into despair. And still the doctors could promise nothing. Rest, they said. But it felt like I was dying.
I yearned for some escape. We had a loft in our house in Lafayette, Louisiana, and after everybody left I literally crawled up there, grabbing onto the stair rail—using every bit of strength I had. I would stack a few pillows underneath me and lie in the sunshine that streamed through the windows. It was my secret place, my prayer closet. Mom had bought a devotional on sale someplace: One Minute of Praise, the book was called. That was about all I was good for. One minute.
“일을 그만두고 네 간호에 집중할까 해.”
엄마가 말씀하셨다. 나는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말했다. 종일 잠만 자는데 그걸 보려고 일을 그만두신다고요?
곧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학교도 가고, 친구들과 놀고, 음악도 듣고. 그러나 기대와 달리 점점 더 악화될 뿐이었다. 리모컨을 들어 올려 TV 채널을 돌리는 일조차 힘에 부쳤다. 부모님은 이 의사 저 의사에게 나를 데려갔다. 전문의도 여럿 만났다. 의사 선생님들은 나에게 끝도 없이 질문을 했고 온갖 검사를 했다. 그렇게 해서 밝혀진 병명은 거대 세포 바이러스 감염이었다. 단핵구증과 유사하지만 더 위험하고 더 강력한 것으로 간을 비롯한 다른 장기들을 공격하는 병이었다.
병원에서는 휴식을 취하라고 했다. 어차피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것뿐이었다. 느릿느릿 집 안을 돌아다니는 내 모습을 보며,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곳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예전의 나로. 친구들과 전화로 수다를 떨고, 숙제를 하고, 밤늦게까지 잠 안 자고 빈둥거리고, 합창단에서 노래하던 나로. 그냥 노래만이라도. 그 점이 가장 가슴 아팠다. 노래할 힘조차 없다는 것이.
이런 일이 왜 일어난 거지?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도대체 그런 삶은 어떤 걸까? 그건 사는 게 아니다. 하지만 건강을 되찾은 내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다.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인데 내 인생이 끝난 것만 같았다. 가슴속에 품은 꿈들이 그저 장난 같았다. 이런 생각이 들자 점점 더 절망의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병원에서는 아무런 방법도 내놓지 못했다. 그냥 쉬는 것, 그게 전부였다. 나는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벗어나고 싶었다. 루이지애나주 라파예트에 있는 우리 집에는 다락방이 있었다. 가족 모두 집을 나서면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계단 난간을 잡고 그 다락방을 향해 말 그대로 계단을 기어 올라갔다. 바닥에 베개 몇 개를 깔고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누웠다. 그곳은 나만의 비밀 공간이었다. 기도하는 성소였다. 엄마가 어디선가 할인 중인 기도 책을 사오셨다. 제목은 ‘일 분 찬양(One Minute of Praise)’이었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단 일 분.
I would close my eyes and try to imagine another person, another Lauren Daigle, someone I used to be, someone I barely resembled now. Confident, exuberant, sure of herself. A singer. I remember when I was just three and the music director at church asked me to be the camel in the Christmas pageant. She handed me a piece of music that I was supposed to sing. “Solo,” it said. I recognized the word: S-O-L-O. “Does this mean I get to sing by myself?” I asked, just to be sure.
“Yes, it does,” she said.
The part was only two or three lines long, but the first time I sang it, I thought, I want to do this forever. Once, in rehearsal, the director skipped my part. “I’m supposed to sing here,” I announced, stopping everything. “Yes, you are,” she said. She never made that mistake again.
Mom called me her little music box. You didn’t even have to wind me up. I’d sing around the house, mimicking Whitney Houston or Celine Dion. “Can’t you get her to stop?” my older brother, Brandon, asked.
“I wouldn’t ever do that,” Mom said. No more than she’d ask him to stop shooting hoops out back.
One rainy day, the kind we often had in Cajun country, I saw the water mix with dirt and turn into mud. It was beautiful, like chocolate milk. My mind leaped forward, verses forming in my head. I wrote them down and drew pictures to go with them.
“It can be a book,” Mom said. I worked on the pictures with crayon and marker, then Mom showed me how to staple the pages together. We’d sit together reading it aloud. I couldn’t quite believe I had written a poem. And somehow I knew that a poem could be a song. It was a revelation.
Now that energy, that wonder, was gone, stripped from me. I lay on the floor in my prayer closet, the sunlight streaming through the windows, warming the floor.
나는 눈을 감고 다른 사람을 상상하려고 애썼다. 또 다른 로런 데이글을.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던 과거의 나. 당당하고 활기 넘치며 자신감에 차 있던 소녀. 노래를 곧잘 하던 소녀. 겨우 세 살밖에 되지 않은 나에게 교회 음악감독 선생님이 크리스마스 연극에서 낙타 역을 해보라고 하신 일이 떠오른다. 그러고는 내가 불러야 할 부분의 악보를 건네셨다. 거기에는 ‘독주’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나는 그 단어를 알고 있었다.
“이건 혼자 불러야 한다는 뜻이에요?”
확인하고 싶어 이렇게 물었다. “그렇단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두세 소절뿐이었지만 노래를 부르는 순간 생각했다. ‘영원히 노래만 하고 싶어.’ 한번은 리허설을 하는데 선생님이 내 부분을 실수로 건너뛰어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여기서 제가 불러야 해요.” 연습이 중단되었다. “그렇지, 네 말이 맞구나.”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이후로 선생님은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하시지 않았다. 엄마는 나를 꼬마 음악상자라고 부르셨다. 태엽을 감을 필요도 없었다. 나는 집 안을 돌아다니며 휘트니 휴스턴이나 셀린 디옹을 흉내 내곤 했다.
“엄마 쟤 좀 말려 줘요.” 오빠 브랜든이 말했다. “절대 그럴 수 없지.” 엄마가 말씀하셨다. 오히려 뒷마당에서 농구하는 오빠를 말리곤 하셨다.
루이지애나 지역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어느 비 오는 날이었다. 나는 흙이 빗물과 섞여 진흙으로 변하는 모습을 보았다.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마치 초콜릿 우유 같았다. 그 순간 머릿속이 빨라지면서 시구가 번득 떠올랐다. 나는 그것을 종이에 옮겨 적고 어울리는 그림도 그려 넣었다.
“책으로도 만들 수 있겠는데?”
엄마가 말씀하셨다. 내가 크레파스와 매직펜으로 그림을 완성하자 엄마는 낱장의 종이들을 스테이플러로 고정하는 방법을 알려 주셨다. 엄마와 나는 나란히 앉아 내가 완성한 시를 큰 소리로 낭독했다. 내가 시를 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시를 노래로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경이로운 일이었다.
그때의 에너지, 그때의 경이로움은 이제 내 안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나만의 성소에 누워 있었다. 창문을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에 바닥이 따뜻했다.
Why couldn’t it penetrate me? Why couldn’t it heal me?
“What are you trying to tell me, God?” I asked. “Who am I supposed to become now?” I’d had all sorts of notions about what I would do someday. Be a missionary somewhere and help poor people. Go into the medical field and help the sick. Now I was sick. I needed help.
I read that five-dollar devotional and listened for God’s voice. Day after day, I kept going back to the loft, struggling up the stairs, pausing on each step to catch my breath. I’d always had a strong faith. Or thought I did. Now it was being tested beyond my endurance. Even if I survived this disease physically, could I survive it spiritually?
One day I was in the bathroom, standing in front of the mirror, staring at the wan girl in her pj’s, too tired to brush her teeth. The oddest thing happened. Someone else looked back at me. Another Lauren Daigle. Literally. Some impossible image of myself. Vivid and real. Was I delirious? No. This felt God-given.
I saw a girl—me—singing in front of thousands of people in an outdoor stadium. Then I saw myself getting on and off a tour bus. I saw this person writing songs, her own songs, and singing them. And going into a studio to record.
The images kept coming to me that day and the next and the next. It was like a movie playing in my head, a multipart serial featuring the person I wished I could be—a dream I thought was being stolen from me by my illness. Words came to me: Lights, camera, action. What was that about? How could that ever happen?
이 햇살은 왜 나를 관통하지 못하는 거지? 내 병을 왜 고쳐 주지 못하는 거지?
“주님, 저에게 무슨 가르침을 주려고 이러시는 건가요? 이제 저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거죠?”
나는 물었다. 나중에 무슨 일들을 할 것인지 다 생각해 놓았는데. 선교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일도 하고 싶고 의료 분야로 진출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고도 싶었다. 이제는 ‘내’가 아픈 사람이 되었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엄마가 사 주신 그 5달러짜리 기도 책을 읽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계단을 한 칸씩 올라갈 때마다 멈춰 서서 숨을 골라야 하는 힘든 여정이었지만 나는 매일같이 다락방을 찾았다. 나는 신실한 신자였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한계를 넘어선 지금 내 신실함도 의심스러웠다. 육체적으로 병을 이겨 낸다 하더라도 영적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어느 날, 욕실의 거울 앞에 서서 잠옷 차림의 창백한 소녀를 바라보았다. 양치질을 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그 사람은 또 다른 로런 데이글이었다. 지금의 내 모습이라고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아주 생생하고 현실적인 모습의 로런 데이글이었다. 헛것을 본 걸까? 아니다. 마치 하나님이 내려 주신 것처럼 느껴졌다.
야외 경기장에서 수천 명의 관객 앞에서 노래하는 소녀가 보였다. 투어버스에 오르고 내리는 모습도 보였다. 직접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모습, 그리고 녹음을 위해 스튜디오로 들어가는 소녀의 모습도 보였다.
그날 이후로 그 이미지는 계속해서 나를 따라다녔다. 마치 머릿속에서 영화가 상영되는 것 같았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연속극처럼. 병이 앗아가 버렸다고 생각한 꿈. 이런 단어들이 떠올랐다.‘조명, 카메라, 액션.’ 도대체 이게 뭐지? 이게 가능한 일인가?
Finally it struck me: This was God’s answer to my prayers. He was giving me his promise. Yes, I would get well, but I would be sick first. Yes, I would be able to go back to normal life but not as the person I thought I was. This time alone—this horrible isolation—was meant to give me strength. All those friends I missed. Even if I had the energy to see them, the doctors were wary of me being exposed to any germ in my fragile state. What I had was my prayer loft. And these images of a promise.
My health improved little by little. It took way longer than the doctors had thought it would—almost two years. I missed the homecoming dance and the prom. With my strength returning, I studied at home for six months, then graduated from a charter school. I did manage to go to Brazil as a missionary—one dream accomplished—then enrolled at Louisiana State University.
I sang in the choir at LSU, reconnecting at last with the joy that singing had always given me. I tried out for American Idol. Lights, camera, action? All the lights were on me, singing in front of an audience. I did pretty well in a couple of seasons, only to get cut at the last moment. That was all right. There was another path for me.
I’d been exposed to all kinds of music. Dad loved classic rock; he was a big Led Zeppelin fan. On long car rides, he’d play a game with us—the Dollar Game, we called it. We listened to the radio and had to name whoever we heard performing. If we got it right, he’d give us a buck. Mom had her own loves—jazz, pop, old standards. I loved Adele as much as I loved Tony Bennett. But after those gigs on American Idol, I wanted to write my own songs, songs about what I believed. What was true. What was holy. Isn’t that what I’d been shown in the mirror?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것은 바로 내 기도에 대한 주님의 응답이라고. 주께서는 나에게 약속을 하셨다. 그래, 난 좋아질 거야. 그 전에 아픔을 먼저 주신 것뿐이야. 그래, 곧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이전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겠지. 이 고독의 시간, 이 끔찍한 고립감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너무나 그리운 친구들. 설사 친구들을 만날 힘이 있다 하더라도 병원에서는 내가 이토록 허약한 상태에서 병균에라도 노출될까 극도로 조심시켰다. 나에게는 내 기도의 공간인 다락방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 희망의 이미지들.
나는 서서히 건강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거의 2년을 앓았는데, 의사 선생님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렸다. 동창회 무도회와 졸업파티가 그리웠다. 건강이 회복되자 집에서 6개월 동안 공부한 끝에 차터 스쿨(정부의 공적 자금을 받지만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학교―역주)을 졸업할 수 있었다. 선교사로 브라질에도 갔다. 꿈 하나가 이루어진 셈이다. 그리고 루이지애나 주립 대학에 들어갔다.
거기서 대학 합창 단원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노래를 부르며 느꼈던 희열을 고스란히 되찾았다. ‘아메리칸 아이돌’(미국 폭스 텔레비전의 연예인 오디션 프로그램―역주)에도 참가했다. 조명, 카메라, 액션? 관객 앞에서 노래하는 나에게 모든 조명이 집중되었다. 두 시즌 동안 꽤 잘해 나가다가 마지막 순간에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나에겐 다른 길이 있으니까.
나는 온갖 장르의 음악을 듣고 자랐다. 아빠는 정통 록 음악 애호가로 레드 제플린의 광팬이었다. 장거리 운전을 하실 때면 아빠는 우리와 게임을 하곤 했다. 우리는 그 게임을 ‘달러 게임’이라고 불렀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의 가수를 우리가 맞히면 아빠가 1달러씩 주는 게임이었다. 엄마는 재즈와 흘러간 대중가요를 좋아하셨다. 나는 토니 베넷을 무척 좋아했지만 그만큼 아델도 좋아했다. 하지만 ‘아메리칸 아이돌’에서 공연을 한 이후로 직접 노래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생겼다. 내가 믿는 것들에 대해 노래하고 싶었다. 진실한 것. 성스러운 것. 이런 것들이 내가 거울에서 봤던 것 아닌가?
Opportunities opened up for me. I performed in bigger and bigger venues. Recorded songs—my own songs. I released my first full-length album in 2015 and the second just this past year. I have won Dove Awards and been nominated for multiple Grammys. It can be overwhelming at times! Critics have compared me to Amy Grant, a singer with Billboard chart numbers that would make any mainstream artist happy.
And yet it is not the acclaim or the success that makes those two years of being really sick worth it. That’s not how it works. Success can disappear as quickly as it comes, and suffering is a part of life. What was true about those days I spent lying in that patch of sunlight in the loft is that God made himself known to me and in that knowing I found myself.
나에게 기회의 문이 활짝 열렸다. 점점 더 큰 장소에서 공연이 이어졌고 내가 작곡한 노래를 녹음할 기회도 생겼다. 2015년에 첫 정규 앨범이 발매되었고 작년에는 2집이 나왔다. ‘도브상’(Dove Awards 미국 복음음악협회에서 수여하는 상으로 기독교 음악 산업에서 뛰어난 업적을 기림―역주)을 받았고, ‘그래미상’(Grammy Awards 미국 음반예술산업아카데미에서 음악 산업의 탁월한 업적에 수여하는 상―역주)에서는 여러 부문의 후보에 올랐다.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하다! 평론가들은 나를 에이미 그랜트와 비교하곤 한다. 에이미 그랜트는 주류 음악가라면 누구라도 좋아할 빌보드 순위에 오른 가수다.
하지만 그 아픔의 2년을 가치 있게 만든 것은 찬사도 성공도 아니다.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다. 성공은 빨리 찾아온 만큼 빨리 사라질 수도 있다. 고통은 우리 삶의 일부다. 다락방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을 받으며 누워 있었던 그 시간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그의 존재를 나에게 알리시고, 그 앎 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한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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