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Longer, Living Better
My First Calling
미스터리 판사
Guideposts 2020 |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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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 판사
As a judge, I’ve never actually thrown the book at anybody.
But I have written a few
판사로서 누구에게도 중벌을 내린 적이 없다. 하지만 책은 몇 권 썼다.
BY DEBRA H. GOLDSTEIN, Birmingham, Alabama
데브라 H. 골드스타인 앨라배마주 버밍엄
I looked over my glasses from the bench and asked, “Is there anything else?” I was confident in the details of the case and ready to deliver a standard hearing closing.
“No, Your Hon—” the attorney began, but his client interrupted.
“Your Honor, I have one more thing,” the man said.
I looked to the attorney. I’d been a judge for 23 years—a female judge from a time when that was neither expected nor particularly respected. I ran a tight ship. It was always “Yes, Your Honor” or “No, Your Honor.” I made a face that said, Get your client under control. That should have been enough. But today the attorney threw his hands in the air, exasperated.
판사석에서 안경 너머로 바라보며 물었다.
“더 이야기할 것이 있습니까?”
사건의 세부사항은 확실했으며 통상적인 심리를 종료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없습니다, 재판장….”
변호사가 말을 시작하는데 그의 의뢰인이 말을 끊었다.
“재판장님,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변호사를 쳐다보았다. 나는 23년 동안 판사였다.‘여성’ 판사를 예상하지도 딱히 존경하지도 않던 시절부터 말이다. 나는 일을 빈틈없이 이끌었다.
언제나 “그렇습니다, 재판장님” 아니면 “그렇지 않습니다, 재판장님”뿐이었다. ‘의뢰인을 제지하시오’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 변호사는 화를 내며 무방비하게 손을 놓고 있었다.
I knew we were in trouble. I turned to the client. “Yes, sir. What is it?”
“I just want you to know, no matter how you rule, I’m buying your book.”
Oh no. My insides did a somersault. I’d been trying for 10 years to keep my writing separate from my career. Scribbling mystery scenes in the wee hours of the morning as I put in full days behind the bench in black robes. For years, nobody had any inkling of what I did in my spare time, but that changed when my first book, Maze in Blue, was published in 2011, followed by a number of short stories. I was trying to sell another novel, Should Have Played Poker: a Carrie Martin and the Mah Jongg Players Mystery. Magazines and local papers were now publishing articles with titles like “Judge Writes Book” and “Judge Wrote Mysteries.” That was the marketing hook. My private passion was fast becoming common knowledge.
I kept a straight face and delivered my ruling. Then I collected my things to head home. In the car, thoughts began to swirl. If everybody knew I was a writer, would that affect my role as a judge? Was this double life no longer sustainable? Would I have to make a choice I dreaded?
I’d been torn between pleasing others and following my passion ever since I was a girl. My dad had wanted desperately for me to choose a practical career that would provide independence, something like nursing or teaching. It was my mother who encouraged my sister and me to do whatever we wanted. A Holocaust survivor, she was a scrapper who believed anything was possible with hard work and chutzpah. And of course if it was God’s will.
곤란한 상황에 부닥쳤음을 깨달았다. 의뢰인에게 몸을 돌려 말했다.
“네. 무엇입니까?”
“그저 판사님께서 아셨으면 합니다. 어떤 판결을 내리시든, 저는 판사님의 책을 살 겁니다.”
‘오, 안 돼.’
속이 울렁거렸다. 10년 동안 내 일과 집필 활동을 구별하려고 애써 왔다. 아침 이른 시간에는 미스터리 소설을 쓰고 일과 중에는 판사복을 입고 판사석에서 꼬박 일하는 식이었다. 몇 년 동안 누구도 내가 여가에 무슨 일을 하는지 감조차 잡지 못했으나, 몇 편의 단편 이후 2011년에 첫 번째 책 『푸른 미로』가 출간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또 다른 소설인 『포커를 했어야 했는데: 캐리 마틴과 마작 선수 미스터리』를 내려고 애쓰던 때이기도 했다. 잡지사와 지역 신문사들이 ‘판사가 책을 쓰다’와 ‘판사가 미스터리를 쓰다’ 같은 제목으로 기사를 냈다. 마케팅 수단이었다. 나의 개인적인 열정이 순식간에 누구나 아는 사실이 되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판결을 내렸다. 그런 다음 귀가하려고 소지품을 챙겼다. 차 안에서 생각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내가 작가라는 사실을 모두 안다면, 그게 판사라는 내 직무에 영향을 미칠까? 이런 이중생활도 더는 유지할 수 없는 걸까? 두려워하던 선택을 해야만 할까?
어렸을 때부터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일과 내 열정을 좇는 일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아버지는 내가 간호사나 교사처럼 자립이 보장되며 실용적인 직업을 택하기를 몹시 원했다. 여동생과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끔 용기를 북돋워 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였던 어머니는 근면과 배짱이면 무슨 일이든 가능하다고 믿는 투사였다. 물론 그게 하나님의 뜻일 때 그렇다는 얘기다.
“I want to be a comedienne,” I told her once.
“Perfect!” she said. “You’re as funny as Carol Burnett.”
When I changed my mind and decided to become a writer, she was all for it. Still, as an oldest child, I felt an obligation to please both my parents. When I graduated from the University of Michigan with degrees in English and history, along with a teaching certification, my father was thrilled. Yet it was my mother who wished me well when I moved to New York two days after graduation to find a job in publishing and start my writing career. “Follow your dreams!” she cheered.
I ended up working for a small publishing house. I liked what I was doing, but doubts still plagued me. What if this didn’t work out? Was I disappointing my father? I started putting together law school applications at night. Law was an honorable, challenging and secure profession. A perfectly practical match for someone with my ambition. I pushed writing to the back of my mind and focused on applications. Eight months later, I picked Emory University School of Law from among my acceptances, as much for the Atlanta weather as its prestigious reputation.
Nose to the grindstone, I hardly noticed as time flew by. By 25, I was graduated and working as a labor lawyer in Birmingham, Alabama, arguing an equal pay case of first impression. By 30, I was married to the love of my life, Joel. We were raising two children from Joel’s previous marriage and, later, our own two kids—twins, a boy and a girl. I got active in my temple and served on numerous community boards. I published legal articles and lectures. Sure, I still wrote a little. A story or a skit here and there. But nothing serious.
At age 36, I was appointed as one of the youngest federal administrative law judges in the country. One of only 26 women.
“코미디언이 되고 싶어요”라고 어머니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아주 좋아! 넌 캐럴 버넷만큼 재미있단다.”
마음을 바꿔서 작가가 되기로 했을 때도 어머니는 대찬성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장녀로서 부모님 두 분 다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내가 영문학 및 사학 학위와 더불어 교사 자격증을 따서 미시간 대학교를 졸업했을 때 아버지는 크게 기뻐하셨다. 그렇지만 졸업 이틀 후에 출판계에서 일자리를 얻고 작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하려고 뉴욕으로 이사했을 때 내가 잘되기를 바란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네 꿈을 따라가렴!”
어머니의 응원이었다.
마침내 소규모 출판사에서 일하게 되었다. 내가 하는 일이 좋았지만, 의심은 계속 따라다녔다. 이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면? 내가 아버지를 실망시키는 중일까? 밤에 로스쿨 지원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법조계는 명예롭고 도전적이면서 안정적인 전문직이었다. 나 같은 염원을 지닌 사람에게 꼭 어울리는 현실적인 조합이었다. 집필은 마음 깊숙이 밀어두고 지원서에 집중했다. 8개월 후, 입학 허가를 받은 학교 중에서 에모리 대학교 로스쿨을 선택했는데 명문대의 명성뿐만 아니라 애틀랜타의 날씨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는 것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악착같이 공부했다. 스물다섯 살에 졸업하고 앨라배마주 버밍엄의 노동 변호사로 일했는데, 논란거리였던 동일 임금 소송을 맡기도 했다. 서른 살에는 일생의 사랑인 조엘과 결혼했다. 남편이 첫 번째 결혼에서 얻은 두 아이와 나중에 우리 부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딸 쌍둥이를 키웠다. 회당(會堂)에서도 적극적이었으며 다수의 지역위원회에도 참여했다. 법률 논문과 강연록을 출판했다. 물론 집필도 꾸준히 조금씩 했다. 이곳저곳에 이야기나 콩트를 쓰는 정도였고 진지한 일은 전혀 아니었다.
서른여섯 살에 미국 내에서 가장 젊은 연방 행정법 판사 중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26명밖에 되지 않는 여성 판사 중 한 명이기도 했다.
I knew it was important for me to be taken seriously, especially as a woman in a male-dominated field. I didn’t fraternize. Didn’t joke. I did sometimes wear something fun underneath my black robes. Some leopard-print or frilly dresses. If I was in the courthouse where I had to cross the waiting room to use the bathroom, I often left my black robes behind. I once overheard a claimant warn another, “She may look normal in a dress, but just you wait. When she’s sitting above you in black robes, it’s like talking to God.”
For years, I lived by the letter of the law, making both my parents proud. I was a judge with a heavy caseload, and my father was happy knowing I was chair of my temple’s education committee. Not exactly a teacher but close! My mother loved our blended family, my work as a Girl Scout leader, my volunteer activities and how I centered God in my life through my temple commitments. I was proud of myself too, but I wasn’t writing much except briefs and legal articles. I couldn’t help but feel as if something was missing.
On top of everything, I often kept late hours with my youngest son, Stephen, who hated going to sleep. I wistfully said one evening how I missed having more time. Especially time to write.
Nine-year-old Stephen looked up and said, “Why don’t you just do it?”
I was taken aback. Why not do it? Because of my job. Because of my family. Because of my other commitments. But how could I explain that to a child? “Because…” I paused. “You never go to bed.”
When bedtime came, Stephen went right into his room and turned off the light. No muss, no fuss. With the night unexpectedly empty, I did what lots of working moms would have done. I watched a movie, painted my nails, read a magazine. In the morning, Stephen walked into the kitchen. “Well,” he asked, “did you finish?”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게 내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특히 남성 중심적인 분야에 있는 여성으로서 더욱 그랬다. 적절하지 않은 친교 관계는 맺지 않고 농담도 하지 않았다. 가끔은 판사복 안에 재미난 걸 입기도 했다. 호피 무늬가 있거나 프릴이 달린 드레스 등이었다. 화장실에 가려면 대기실을 가로질러야 했던 법원 청사 안에서는 종종 판사복을 벗어 두고 다녔다. 한번은 어떤 청구인이 다른 청구인에게 충고하는 걸 엿들었다.
“드레스 입은 골드스타인 판사는 평범해 보일지 모르지만, 두고 보세요. 판사복을 입고 높은 곳에 앉아 있을 땐 하나님께 얘기하는 것 같다니까요.”
오랫동안 글자 그대로 법에 따라 살면서 부모님 두 분 모두 자랑스럽게 해드렸다. 나는 사건을 많이 맡는 판사였고 아버지는 내가 회당 교육위원회 의장인 걸 알고 기뻐하셨다. 정확히 교사는 아니었지만 비슷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나의 혼합 가족(자식이 있는 사람이 재혼으로 이룬 가족―역주), 걸스카우트 리더로서 하는 일, 내 봉사활동과 내가 회당 활동에 헌신하면서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는 걸 아주 좋아하셨다. 나도 스스로 자랑스러웠지만, 준비서면이나 법률 논문 외에 글은 거의 쓰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무언가 놓치는 기분이었다.
이 모든 일에 덧붙여 밤늦은 시간이면 종종 잘 마음이 없는 막내아들 스티븐과 보내야 했다. 어느 날 저녁에는 시간이 좀 더 있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하며 말했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게 내게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특히 남성 중심적인 분야에 있는 여성으로서 더욱 그랬다. 적절하지 않은 친교 관계는 맺지 않고 농담도 하지 않았다. 가끔은 판사복 안에 재미난 걸 입기도 했다. 호피 무늬가 있거나 프릴이 달린 드레스 등이었다. 화장실에 가려면 대기실을 가로질러야 했던 법원 청사 안에서는 종종 판사복을 벗어 두고 다녔다. 한번은 어떤 청구인이 다른 청구인에게 충고하는 걸 엿들었다.
“드레스 입은 골드스타인 판사는 평범해 보일지 모르지만, 두고 보세요. 판사복을 입고 높은 곳에 앉아 있을 땐 하나님께 얘기하는 것 같다니까요.”
오랫동안 글자 그대로 법에 따라 살면서 부모님 두 분 모두 자랑스럽게 해드렸다. 나는 사건을 많이 맡는 판사였고 아버지는 내가 회당 교육위원회 의장인 걸 알고 기뻐하셨다. 정확히 교사는 아니었지만 비슷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나의 혼합 가족(자식이 있는 사람이 재혼으로 이룬 가족―역주), 걸스카우트 리더로서 하는 일, 내 봉사활동과 내가 회당 활동에 헌신하면서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는 걸 아주 좋아하셨다. 나도 스스로 자랑스러웠지만, 준비서면이나 법률 논문 외에 글은 거의 쓰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무언가 놓치는 기분이었다.
이 모든 일에 덧붙여 밤늦은 시간이면 종종 잘 마음이 없는 막내아들 스티븐과 보내야 했다. 어느 날 저녁에는 시간이 좀 더 있으면 좋겠다고 아쉬워하며 말했다. 특히 글 쓸 시간을 원했다.
아홉 살이던 스티븐이 고개를 들더니 말했다.
“그냥 한번 해보는 게 어때요?”
깜짝 놀랐다. 왜 안 하는 거지? 일 때문에. 가족 때문에. 책임져야 하는 다른 일들 때문에. 하지만 아이에게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왜냐하면….” 잠시 말을 멈췄다.
“스티븐이 절대 자러 가지 않으니까.”
잘 시간이 되자 스티븐은 바로 자기 방으로 가서 불을 껐다. 식은 죽 먹기였다. 예상치 못하게 텅 빈 밤에는 많은 워킹맘이 할 만한 일을 했다. 영화를 보고 손톱에 매니큐어를 발랐으며 잡지를 읽었다. 아침이 되자 스티븐이 부엌으로 걸어와서 물었다.
“음, 다 하셨어요?”
I felt like an idiot. Here I was preaching to my daughter’s Girl Scout troop to “reach for the sky” and “follow your dreams.” And what was I doing?
It would take almost 12 years of guilt and false starts before I finally sat down to write something significant. A friend lent me her beach condo for the weekend to give me time and space to do it. But what kind of story could I write? What did I have to say? I’d spent so much time pleasing others that I wasn’t totally sure who I was. I sat at a desk and started thinking about what I knew well enough to craft into a story. University of Michigan in the seventies. I started scribbling in longhand on a legal pad. By the end of the weekend, I had 85 pages. I kept writing, filling more legal pads, and five of those original pages went on to become my first book, a whodunit called Maze in Blue. I’d become a mystery author at age 56. My mother was thrilled.
My next novel, Should Have Played Poker, tumbled out. I loved writing mysteries and for years thought I wouldn’t have to choose between keeping my respectable job and following my passion. But the man in the courtroom calling me out from behind the bench now had me thinking differently. I needed to have a talk with my husband about the future of my career and our life.
“Joel,” I said as I walked in the door at home, “we need to run some numbers.”
Was it time to choose? Joel and I looked at our finances. We had already put our kids through school. We were in good financial shape. We could—was it possible?—make things work. That is, if I wanted to. Joel went to bed, and I stayed up praying. God, do I give up my career? What is your will for me? I’d sold a book and 13 short stories, but there was no promise of future success in writing. As I prayed, I relaxed and opened myself to divine direction. The knot in my stomach went away. I felt suddenly at peace.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딸아이의 걸스카우트 대원들에게 “야망을 품고 꿈을 좇아라”라고 설교를 늘어놓았다. 그런데 대체 나는 뭘 하는 거지?
마침내 앉아서 의미 있는 걸 쓰기 전까지 죄책감과 잘못 시작했다는 생각에 시달리며 거의 12년을 보냈다. 한 친구가 주말 동안 글을 쓸 시간과 장소를 제공해 주려고 바닷가 아파트를 내주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종류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나머지 ‘내’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책상에 앉아서 이야기로 풀어낼 만큼 잘 아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의 미시간 대학교였다. 리걸 패드(한 장씩 떼어 쓸 수 있게 된 줄이 쳐진 황색 노트―역주)에 손으로 쓰기 시작했다. 주말이 끝날 무렵 85페이지를 채웠다. 더 많은 리걸 패드를 채우며 계속 써 내려갔다. 그렇게 쓴 최초의 5페이지가 첫 번째 책인 추리물 『푸른 미로』가 되었다. 56세에 미스터리 작가가 되었다. 어머니는 정말 기뻐하셨다.
다음 소설 『포커를 했어야 했는데』는 급작스럽게 나왔다. 미스터리 집필을 즐기며 존경받을 만한 직업을 유지하는 일과 열정을 따르는 일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할 필요는 없다고 수년간 생각했다. 하지만 법정에서 판사석에 있던 나를 불러 낸 그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딸아이의 걸스카우트 대원들에게 “야망을 품고 꿈을 좇아라”라고 설교를 늘어놓았다. 그런데 대체 나는 뭘 하는 거지?
마침내 앉아서 의미 있는 걸 쓰기 전까지 죄책감과 잘못 시작했다는 생각에 시달리며 거의 12년을 보냈다. 한 친구가 주말 동안 글을 쓸 시간과 장소를 제공해 주려고 바닷가 아파트를 내주었다. 하지만 내가 어떤 종류의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무슨 얘기를 해야 할까?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 나머지 ‘내’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책상에 앉아서 이야기로 풀어낼 만큼 잘 아는 게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의 미시간 대학교였다. 리걸 패드(한 장씩 떼어 쓸 수 있게 된 줄이 쳐진 황색 노트―역주)에 손으로 쓰기 시작했다. 주말이 끝날 무렵 85페이지를 채웠다. 더 많은 리걸 패드를 채우며 계속 써 내려갔다. 그렇게 쓴 최초의 5페이지가 첫 번째 책인 추리물 『푸른 미로』가 되었다. 56세에 미스터리 작가가 되었다. 어머니는 정말 기뻐하셨다.
다음 소설 『포커를 했어야 했는데』는 급작스럽게 나왔다. 미스터리 집필을 즐기며 존경받을 만한 직업을 유지하는 일과 열정을 따르는 일 중에서 한 가지를 택할 필요는 없다고 수년간 생각했다. 하지만 법정에서 판사석에 있던 나를 불러 낸 그 남자 때문에 달리 생각하게 됐다. 앞으로 펼쳐질 내 경력과 우리 생활을 두고 남편과 이야기할 필요가 있었다.
“조엘, 우리 계산 좀 해봐야겠어요.”
집 현관문에 들어서며 말했다.
선택해야 할 시간이었을까? 조엘과 나는 재정 상황을 살폈다. 아이들은 모두 학업을 끝냈다. 우리는 재정적으로 건전했다. 일이 굴러가게끔―과연 가능할까?―할 수 있었다. 내가 원한다면 그럴 수 있었다는 얘기다. 남편은 잠자리에 들었으나 나는 자지 않고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일을 포기하는 건가요? 절 위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요?’
책 1권과 단편 13편을 팔았으나, 집필에서 앞으로의 성공은 보장할 수 없었다. 기도하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하나님의 지시에 나를 맡겼다. 뱃속이 조여드는 기분이 사라졌다. 갑자기 평화를 느꼈다.
The next morning, I walked into the office and announced that I wanted no more cases assigned to me. “I’ll work out my docket,” I promised. I reckoned it would take another six or seven months to get through all the cases. But afterward I would be free to follow my passion. The other judges looked shocked. An administrative judgeship was a lifetime appointment.
“Are you sick?” one of the judges asked.
Another took me aside. “What are you going to do every day?”
I smiled. “Have a life.”
It’s been more than six years since I left my judgeship, and I’ve never looked back. I’ve published two more books: One Taste Too Many and Two Bites Too Many, the first books in Kensington’s Sarah Blair mystery series. My life as a writer isn’t exactly what I expected. I’m a little disorganized, and I never write as fast as I’d like. But I love working out a mystery. Have you heard the one about how the judge leaves her day job and lets her dream and God guide her? Took me long enough to figure it out.
다음 날 아침 사무실로 가서 사건을 더 배정받고 싶지 않다고 알렸다. “내 공판 일정표를 작성하겠어요”라고 약속했다. 모든 사건을 끝내려면 6~7개월 정도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에는 내 열정을 좇아 자유로워질 터였다. 다른 판사들은 충격에 빠진 모습이었다. 행정 판사직은 종신직이기 때문이다.
“편찮으세요?”
한 판사가 물었다. 다른 이는 날 옆으로 데려갔다.
“매일 뭐 하실 거예요?”
“인생을 살아야죠.” 나는 미소 지었다.
판사직을 내려놓고 6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결코 뒤돌아보지 않았다. 켄싱턴 출판사의 사라 블레어 미스터리 시리즈를 시작하면서 『한 가지 맛이 남았어』와 『두 입이 남았어』라는 책 2권을 더 냈다. 작가로서의 삶은 예상했던 바와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는다. 나는 좀 무질서하며 결코 원하는 만큼 빨리 집필하지 못한다. 하지만 미스터리를 쓰는 일이 즐겁다. 본업을 그만두고 꿈과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끌게 한 판사에 대한 미스터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 이야기를 알아내는 데는 충분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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