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LTH BREAKTHROUGH

고집쟁이 코치


Guideposts 2020 | 05


Health Breakthrough

Guideposts 2020 | 05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Exercise? With my COPD, I could barely walk across a room

운동하자고? COPD* 때문에 걸어서 방을 가로지르기도 힘든데? 


BY CANDYCE NORRIS, Wilsonville, Oregon

캔디스 노리스  오리건주 윌슨빌



My husband, Jim, added another pill to the pile of meds on the kitchen counter. Ever since my release from the hospital two days earlier, he’d kept careful track of which ones I needed to take and when. It was overwhelming, everything I would need to do to recover. And most of it was on me. It’s not as if Jim or anyone else could breathe for me. This is hopeless, I thought. I’m never going to be able to do this.

Just then, my youngest son, Jeremey, walked into our apartment. “What did the doctor say?” he asked. Jim had taken me to a follow-up pulmonologist appointment earlier that morning.

“He wants me to go to pulmonary rehabilitation,” I said, trying to sound more positive than I felt. “It meets two or three times a week about managing COPD, learning to monitor and better control breathing, managing stress and exercising. It sounds great, but with your dad out of work, we just can’t afford it. I asked him if I could do it on my own.”

I’d started smoking when I was 16. I loved everything about it: the nicotine rush, the taste, the feel of a cigarette between my fingers, how smoking kept me slim and especially how social it was, hanging out with other smokers. My parents smoked; so did nearly everyone I knew back then. Jim included. I quit smoking while I was pregnant with each of our four kids, but I always picked it up again afterward. I started having breathing difficulties, frequent colds, lung infections. No big deal, I told myself. At 41, I was hospitalized with pneumonia. That’s when a doctor told me I had COPD, an incurable, chronic lung disease. I’d shrugged that off too. Until both my parents died from COPD-related causes. Even so, it took me another six years before I was able to quit for good. By then I was landing in the hospital regularly. I figured I was headed down the same path as my parents. Nothing I could do to stop it. I hated thinking I wouldn’t be there for the kids and grandkids. But God hadn’t saved my parents. I couldn’t imagine him working some miracle for me. 


남편 짐이 부엌 조리대에 쌓여 있던 약 더미에 알약 하나를 추가했다. 이틀 전 내가 병원에서 퇴원했을 때부터 남편은 내가 무슨 약을 언제 먹어야 하는지 주의 깊게 살폈다. 회복하기 위해 해야 하는 모든 일이 버거웠다. 대부분 내게 달려 있었다. 남편이나 다른 누가 대신 호흡해 준다면 모를까. 

‘희망이 없어. 결코 제대로 해낼 수 없을 거야.’

나는 생각했다. 바로 그때 막내아들 제레미가 아파트로 걸어 들어왔다.

“의사가 뭐라고 해요?”

남편이 그날 아침 일찍 호흡기 내과 추적 검사에 날 데리고 다녀온 참이었다. 

“의사는 내가 호흡 재활 치료를 받았으면 해. 일주일에 두세 번 만나서 COPD를 관리하는 건데 호흡을 관찰하고 잘 조절하는 법, 스트레스를 다스리는 법, 운동하는 법을 배우는 거야. 좋은 생각인 것 같지만, 네 아빠가 실직 상태니까 프로그램에 댈 돈이 없어. 의사에게 나 혼자 할 수 있는지 물어봤단다.” 

내가 느낀 기분보다는 긍정적으로 들리게 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열여섯 살에 흡연을 시작했다. 세차게 밀려드는 니코틴, 그 맛, 손가락 사이에 끼웠을 때 그 감촉,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고 특히 다른 흡연자와 어울릴 때 친목에 도움이 된다는 점까지 담배의 모든 면을 좋아했다. 부모님도 흡연자였고, 당시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이가 담배를 피웠다.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네 아이를 임신할 때마다 금연했지만 나중에는 항상 담배를 다시 집어 들었다. 호흡 곤란, 잦은 감기, 폐 감염 같은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별일 아니라고 혼잣말했다. 41세에 폐렴으로 입원했다. 의사가 내게 치료할 수 없는 만성 폐 질환인 COPD가 있다고 얘기한 게 그때였다. 그마저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애썼다. 부모님 두 분 모두 COPD 관련 요인으로 돌아가실 때까지 그랬다. 그런데도 완전히 금연하는 데 6년이 더 걸렸다. 그때쯤 정기적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부모님과 같은 길에 들어서고 말았다는 걸 깨달았다. 멈추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이들과 손주들을 위해 있어 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게 싫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부모님을 구해 주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날 위해 기적을 행하시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었다.


The spring of 2013, I started coughing all the time. I would come home from my job as a night manager at Denny’s, my head swimming from lack of oxygen. One night, I felt so weak I begged God to get me back to our apartment safely. I figured I’d be okay after a few hours with my nebulizer. But the next morning, I collapsed. I was in the hospital a week. The doctors told Jim I wasn’t going to make it, but I’d pulled through—barely. At 58, I felt more like 88.

The pulmonologist’s words from this morning rang in my ears. “This is serious. You need to be in a treatment program. Immediately.” I’d meant what I said about doing a program on my own. But I had no idea where to begin. Just walking across a room made me feel as if the wind had been knocked out of me.

There in the kitchen, my son looked at me, his eyes pleading. “Let me help you,” Jeremey said. “Tomorrow before you leave for your shift, we’ll go down to the fitness room.” Our apartment complex had a fitness room, where Jeremey worked out. I was proud of him, especially how he and his siblings had quit smoking, but he couldn’t understand what I was going through.

“Maybe in a few days,” I said. “I have to get my strength back.”

“We’ll go slow, Mom,” he said. “I’ll be with you every step of the way. You can’t put this off.”

Just getting to the fitness room, I had to stop several times to catch my breath. I felt the sweat trickling down my face.

Finally we got there. “Let’s try the treadmill,” Jeremey said. Couldn’t we just call it a day?

I stepped on the machine gingerly, and Jeremey adjusted it to its lowest speed. “You’ve got this, Mom,” Jeremey said.

Within seconds, I was gasping for air, gripping the bars on either side for dear life, my feet straddling the belt. “I can’t do this,” I said.

“It’s okay,” Jeremey said. “Take as many breaks as you need to.” He was so patient, so eager to help. I didn’t want to let him down. This time, I made it an entire minute before stopping. Finally, after I’d walked a total of 10 minutes, with plenty of breaks, he let me stop.


2013년 봄, 기침을 달고 살기 시작했다. 데니스(미국 패밀리 레스토랑 체인-역주) 야간 매니저로 일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면 산소 부족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어느 날 밤에는 너무 기운이 없어서 하나님께 아파트까지 무사히 데려다 달라고 간청하기도 했다. 의료용 흡입기를 사용하면 몇 시간은 괜찮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다음 날 아침에 졸도하고 말았다. 일주일 동안 병원에 있었다. 의사들은 남편에게 내가 고비를 넘기지 못할 거라고 했으나, 간신히 회복했다. 58세인데도 88세 같은 기분이었다. 

그날 아침 호흡기 내과의가 했던 말이 귓전에 울렸다. 

“심각해요. 치료 프로그램을 시작해야 합니다. 즉시요.” 

프로그램을 혼자 해보겠다고 한 내 얘기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저 방을 가로질러 걸었을 뿐인데도 바람이 때려눕히는 기분이었다. 

부엌에서 아들이 간청하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내가 도울게요. 내일 엄마가 근무 시간에 맞춰 나가기 전에 같이 피트니스 룸으로 가요.”

아파트 단지에는 피트니스 룸이 있었고 제레미는 거기서 운동했다. 나는 제레미가 자랑스러웠는데, 특히 아이들이 금연했다는 점이 뿌듯했다. 하지만 아들은 내가 겪을 일을 알지 못했다. 

“며칠 지나고 보자. 체력을 좀 회복해야 해.”

“천천히 할 거예요, 엄마. 매 순간 곁에 있을게요. 운동을 미룰 수는 없어요.” 

그저 피트니스 룸까지 가는 데도 몇 번이나 멈추고 숨을 돌려야 했다. 얼굴을 타고 가늘게 떨어지는 땀이 느껴졌다. 마침내 도착했다.

“러닝머신 해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면 안 될까? 

내가 아주 조심스럽게 기계에 오르자 아들이 가장 낮은 속도에 맞췄다.

“할 수 있어요, 엄마.”  

몇 초 만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양쪽 손잡이를 필사적으로 부여잡았고, 발은 벨트 양쪽으로 넓게 벌렸다. 

“못하겠어.” 

“괜찮아요. 원하는 만큼 쉬세요.” 

아들의 인내심은 대단했고 도와주려는 열의가 넘쳤다. 아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멈추기 전까지 1분을 꽉 채워서 해냈다. 마침내 여러 차례 쉬기는 했지만 다 합쳐서 10분을 걷고 나자 아들이 그만해도 된다고 했다. 


“That was great,” Jeremey said. “I want you to work up to an hour of exercise a day.” An hour? Was he nuts? My lungs burned. Maybe if I were younger. There were limits to what someone with COPD could do.

Jeremey never let me miss a workout. At the end of the first week, I’d gone 12 minutes before I even realized it. “You rock, Mom!” Jeremey said. Every few days, I made it another minute. To 15, 20. At the end of the first month, I was walking 30 minutes a day. I was still taking breaks but far fewer than when I’d started. Jeremey walked on a treadmill beside me. Every session felt like an eternity. But I looked forward to spending time with Jeremey, having something to share, that thing I’d always liked about smoking. The rest of my family cheered me on: Jim, my other children, even my oldest granddaughter, Ashlee.

In two months, I was up to an hour on the treadmill. Amazing! Jeremey was as pumped as I was. I said a prayer of thanks that he wasn’t pushing me to do more. My breathing was easier, and I had more energy than I’d had in years, but it wasn’t as if I were an athlete or anything. I still had bad days—days when I felt winded, when I strained for each breath. I’d been able to get off some medications, but I still depended on steroids. The side effects sometimes made it impossible to sleep.

One night, I was in the living room, well past midnight, watching television when Jeremey got home from his job at a window manufacturing company. Jim had gotten hired there too.

Jeremey sat down next to me. A commercial came on for a local charity race, a 5K.

“You and I should do that!” he said. “It’s not much longer than what you’re already walking.”

I stared at him. “No way,” I said. Walking on a flat treadmill was one thing, but going up and down hills? I’d be in the way of the actual runners. Jeremey’s encouragement could take me only so far.

“We’re doing this, Mom,” Jeremey said. There was the same determination he’d had from the beginning. I took as deep a breath as I could manage.

“Okay,” I said to him. “As long as you’re there to carry me when I can’t go any further.”


“아주 좋아요. 엄마가 하루에 한 시간까지 운동하면 좋겠어요.”

한 시간이라고? 쟤가 제정신인가? 폐가 타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더 젊다면 가능할지도. COPD 환자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제레미는 내가 운동을 거르는 일을 절대 허락하지 않았다. 첫 주 주말에는 알아차리지도 못하는 새에 12분을 걸었다.

“엄마가 해냈어요!” 

며칠 간격으로 15분, 20분으로 새로운 시간 기록을 세웠다. 첫 달이 끝날 무렵에는 하루에 30분을 걸었다. 여전히 쉬어야 했지만 처음 시작할 때에 비하면 훨씬 줄어들었다. 제레미는 옆에 있는 러닝머신에서 걸었다. 운동할 때마다 영원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아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고 공유하는 게 있다는 사실이 좋았는데, 바로 흡연에서도 항상 좋아하던 점이었다. 나머지 가족은 날 응원했다. 남편과 세 아이, 첫 손녀인 애슐리까지 그랬다.   

두 달이 지나자 러닝머신에서 한 시간까지 있었다. 이럴 수가! 제레미도 나만큼 잔뜩 들떴다. 아들이 더는 밀어붙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감사 기도를 올렸다. 호흡이 편해졌고 지난 몇 년보다 기력도 좋아졌다. 하지만 내가 운동선수 비슷한 사람이 되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숨이 가쁘거나 숨 쉴 때마다 온 힘을 다해야 하는 힘든 나날이 여전히 이어졌다. 약 몇 가지는 끊을 수 있었지만, 지속해서 스테로이드에 의존했다. 때때로 나타나는 부작용은 불면이었다.

어느 밤, 자정을 훨씬 넘긴 시각에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데 막내가 일터인 창문 제조회사에서 퇴근하고 돌아왔다. 남편도 예전에 같은 곳에서 일했다. 

아들이 내 곁에 앉았다. 지역 자선단체가 주관하는 5km 달리기 대회 광고가 나왔다. 

“우리는 저걸 해야 해요! 엄마가 지금 걷는 거리보다 많이 길지 않아요.” 

아들을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기복이 없는 러닝머신 위를 걷는 건 할 수 있지만, 언덕을 오르내린다고? 제대로 달리는 사람을 방해하게 될 터였다. 제레미의 격려가 통하는 건 여기까지였다. 

“할 수 있어요, 엄마.” 

아들에게는 처음과 같은 결의가 있었다. 가능한 한 깊게 심호흡했다. 

“좋아. 대신 네가 함께 출전해서 엄마가 더 갈 수 없을 때 데리고 간다는 조건에서야.”


With Jeremey, I trained for months, starting with walking around the block and then graduating to hills. With the slightest incline, I was bent over, catching my breath. When it got too tough, Jeremey supported my hips and literally pushed me to the top of the hills. Slowly, I felt myself getting stronger. My confidence grew. The time I spent exercising with Jeremey was the best part of my day. I started wearing a pulse oximeter, a fingertip blood oxygen saturation monitor, so I could see when my oxygen level was getting low and rest before I was out of air, managing my breathing, as I would have been taught in pulmonary rehab.

Race day. a year ago, I had nearly died. Now Jeremey and I were standing amid a throng of people, all eager to take on this challenge. Except me. I took some comfort in spying a few other nervous faces. My whole family, including my grandkids, had come to watch.

“Remember, this was your idea,” I muttered to Jeremey.

“I don’t think I can do it,” he said. I thought he was joking, but he was doubled over. “I’ve got a stomach bug or something. I’m really sorry.”

“It’s okay,” I said. “I guess it just wasn’t meant to be.” I did my best not 

to look disappointed. Behind me I heard a voice.

“I’ll do it with you, G’mama,” said Ashlee, my 19-year-old granddaughter. I hesitated. I hadn’t trained with her. She didn’t know my pace. What if I had problems?

“G’mama, we are doing this together,” she said. Jeremey wasn’t the only one who wouldn’t take no for an answer.

The starting gun sounded, and I felt a surge of adrenaline. One step at a time, I told myself. I thought about the past year, that scary night driving home from work, begging God to help me breathe. I was here because of him. He’d given me the best coach and trainer I could’ve asked for in Jeremey. A whole family of cheerleaders. God had always wanted me to be healthy. I just needed to want it too, enough to do something about it. I took a bigger step. Then another, my pace quickening.

Ashlee was wonderful. She sensed when I was tiring and when I needed to push myself. We crossed the finish line in less than an hour—57 minutes to be exact. Less time than I walked on the treadmill.

My family rushed to me and gave me a group hug. “I’m so proud of you, Mom,” Jeremey said. I knew it had been a team effort—Team Norris. I sure liked the sound of that. My legs ached. My breathing was ragged. But 

I felt great inside.

“The next race,” I told Jeremey, “we’re doing together.”

That was six years ago. Since then, Jeremey and I have completed seven 5Ks and two obstacle courses. I’m taking up yoga and doing calisthenics every day. COPD is chronic and incurable but not untreatable. In fact, I feel more alive than ever.


아들과 함께 몇 달간 훈련했다. 블록 주변을 걷는 것부터 시작해서 언덕까지 발전했다. 아주 작은 경사에도 몸을 굽히고 숨을 돌렸다. 너무 힘들 때면 제레미가 내 허리께를 받치고 말 그대로 언덕 꼭대기까지 날 밀어 올렸다. 서서히 나 자신이 더 강해지고 자신감이 쌓이는 게 느껴졌다. 아들과 함께 운동하는 시간이 일과 중 가장 즐거웠다. 손가락 끝 혈액의 산소 포화 상태를 보여 주는 산소 포화도 측정기를 착용하기 시작했는데, 덕분에 산소 수치가 언제 낮아지는지 알 수 있어서 공기가 부족해지기 전에 호흡을 가다듬으며 쉴 수 있었다. 폐재활 치료에서 배운 방식이었다. 

대회 당일이 되었다. 1년 전 나는 거의 죽을 뻔했다. 이제는 도전에 맞서려는 열의가 가득한 인파 사이에서 아들과 함께 서 있었다. 나는 예외였다. 초조해하는 몇몇 얼굴을 살피며 위안을 찾았다. 손주들을 포함하여 온 가족이 보러 왔다.

“기억해. 이건 네 생각이었어.”

제레미에게 푸념했다. 

“난 못할 것 같아요. 장염 같은 건가 봐요. 정말 미안해요.”

농담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들이 고통으로 몸을 구푸렸다.

“괜찮아. 그럴 의도는 아니었던 것 같으니까.”

실망한 기색을 비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같이 갈게요, 할머니.”

열아홉 살 손녀 애슐리였다. 망설였다. 같이 훈련한 적이 없으니 손녀는 내 페이스를 몰랐다. 나한테 문제라도 생긴다면? 

“할머니. 우리는 같이 ‘해낼’ 거예요.”

안 된다는 대답을 절대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제레미만은 아니었다. 

출발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고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을 느꼈다.‘한 번에 한 걸음씩’이라고 혼잣말을 했다. 지난 1년을, 퇴근해서 귀가하던 그 무시무시한 밤을, 숨 쉴 수 있게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애원하던 일을 떠올렸다. 그분 덕분에 여기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제레미를 통해 내가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코치 겸 트레이너를 보내 주셨다. 온 가족이 치어리더였다. 신께서는 언제나 내가 건강하기를 바라셨다. 나는 그저 건강을 원하기만 하면 됐다. 건강해지기 위해 무엇인가를 실천할 만큼 원하면 되는 일이었다. 보폭을 더 크게 내디뎠다. 또 한 번 그랬다. 페이스가 점점 빨라졌다. 

애슐리는 대단했다. 할머니가 언제 지쳤는지, 언제 스스로 채찍질해야 하는지 알아차렸다. 우리는 한 시간 이내에 나란히 결승선을 통과했다. 정확히 57분이었다. 러닝머신에서 걸을 때보다 덜 걸렸다. 

가족이 달려 나와 단체로 안아 주었다. 

“엄마가 정말 자랑스러워요.”

제레미가 말했다. 노리스 가족 팀이 함께한 노력이라는 걸 알았다. 그게 정말 좋았다. 다리가 아프고 호흡은 불규칙했다. 하지만 내면에서는 희열을 느꼈다. 

“다음 시합은 같이하는 거다.”

제레미에게 말했다.

그게 6년 전이다. 그때부터 제레미와 나는 5km 경주 7차례, 장애물 코스  2차례를 완주했다. 지금은 매일 요가와 건강 체조를 한다. COPD는 만성 불치병이지만 대처할 수 없는 병은 아니다. 사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살아 있다고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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