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ith And Living
치열하고 자유로우며 활기차게
Guideposts 2020 | 10
Faith And Living
Guideposts 2020 | 10
치열하고 자유로우며 활기차게
Going where love and Jesus take you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가 이끄시는 곳으로
BY JEN HATMAKER, Austin, Texas
젠 햇메이커 텍사스주 오스틴
Something you probably know about me, whether it’s from watching my HGTV series My Big Family Renovation or following me on Instagram, is that I like to speak my mind. The things I love—God, my family, my community—I love big-time. And when I see injustice in the world, so help me, Jesus, you will hear me roar, whatever the consequences.
I wasn’t always so comfortable in my own skin. I am, by nature, a type A rule follower, thirsty for affirmation. When I was young, I was prepared to grow up and behave how the Men in Charge thought I should be: quiet and demure. But hiding, posing and pretending is exhausting. It didn’t take long for me to realize that in order to bring my full gifts to bear on this earth, to nourish myself and others, I needed to let the deepest parts of myself rise up.
I wrote my latest book, Fierce, Free and Full of Fire, to share my stories about learning to live more authentically and help guide others toward the same. Being myself has cost me, but I am also breathing clean air for the first time. I’m not afraid anymore. I’m offering you everything I learned, because I want this for you too.
HGTV 시리즈 〈나의 대가족 혁신〉을 시청했든 인스타그램에서 날 팔로잉했든 나에 관해 여러분이 아는 것은 내가 터놓고 얘기하길 좋아한다는 점일 듯싶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하나님, 가족, 공동체-을 나는 아주 좋아한다. 세상의 부당함을 목격하면 결과가 어찌되든 간에 맹세코 내가 고함치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나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이 언제나 편하지는 않았다.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A형 유형(긴장하고 성급하며 경쟁적인 성격‒역주)의 인간으로 규칙을 따르고 확실한 말을 좋아한다. 어렸을 때는 높은 사람들이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로 성장하고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바로 조용하고 얌전히 구는 거였다. 하지만 숨기고 겉치레로 가장하는 일은 심신을 지치게 했다. 이 세상에 온 재능을 쏟고 나 자신과 타인에게 자양분이 되기 위해서는 가장 깊숙한 내면을 드러내야 한다는 걸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더 진실하게 사는 법을 배우는 이야기를 공유하고 다른 이들도 같은 방향으로 인도하고 싶어서 최신작 『치열하고 자유로우며 활기차게』를 집필했다. 나 자신이 되느라 값비싼 대가를 치렀지만, 처음으로 깨끗한 공기를 마시는 기분이기도 했다. 더는 두렵지 않다. 내가 배운 모든 바를 알리려고 한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일이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BE WHO GOD MADE
I was raised around well-behaved women like my mom, my grandma and their friends. Don’t get me wrong: I loved these suburban church women who didn’t drink, never cussed and sang in the Christmas cantatas. My mom and the neighborhood moms were all smart and capable, but they rode in the passenger seat.
I barely saw women in civic leadership, corporate management—and certainly not the pulpit. Growing up, I assumed that I would find my place in their world, one in which men were in charge and women acted as behind-the-scenes helpers. Then, when I was nine, I met Miss Prissy.
Miss Prissy was a family friend. She dressed head to toe in leopard print, was supermodel gorgeous and blew my mind. “I think I’ll get my nose done,” she said without a hint of shame. Whoa! I didn’t know women could take up space like that. And she refused to apologize for it.
Seeing a woman like Miss Prissy living so comfortably in her own skin opened me up to new possibilities. Later, it was the lady deacons at my first church out of college who expanded my ideas of what women—especially religious women—could be. Then it was author Anne Lamott. Pushing me a little bit each time until my husband, Brandon, and I opened our own church in Austin.
Looking back, I realize I was never wired to be a woman like my mom or grandmother, as much as I loved them. God put other teachers on my path to help me be who he made: a fiery, funny, self-deprecating spiritual leader. I couldn’t be anyone else.
CELEBRATE YESES BUT RESPECT NOS
Around the time our oldest son, Gavin, turned 13, we adopted two children from Ethiopia, Ben and Remy. Overnight, we went from a family of five to a family of seven. We were thrilled to have five kids, but holy moly! We were moving fast. Brandon and I looked at each other. “We’re going to have to really carve out time for each kid,” I said.
We hatched a plan. Whenever one of our children turned 13, one parent would take them on a special one-on-one trip. The details of each trip could differ. Colorado. New York. But one fact would remain the same. These were “yes” trips.
Yes to Gavin hiking up a steep waterfall Mom would normally say no to, yes to two desserts, yes to carriage rides through Central Park, yes to Remy getting her eyebrows waxed at Saks Fifth Avenue. There is a time for restraint and normal rules, and yes trips are not it. These adventures supply some of our best memories.
I wish I could say yes to everything. Yeses are fun. But the flip side of yes is no. Without nos, we would be overwhelmed by our commitments. Mostly, when I am asked to do something, it is for a good cause. I am usually at least somewhat qualified and enthusiastic. I am tempted to always say yes. But unless something isn’t just a yes for me but a heck yes, I have learned to say no. Holding back my tepid yes makes room for someone else’s heck yes. It allows us all to offer our highest point of contribution across the board.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 사람이 되자
나는 엄마, 할머니, 그리고 두 분의 친구들처럼 품행이 바른 여성들 사이에서 자랐다. 오해하지 않길 바란다. 술도 마시지 않고 욕하는 법이 없으며 크리스마스 칸타타를 노래하면서 교외 교회에 다니는 여성들을 나는 무척 좋아했다. 엄마와 이웃 아주머니들은 모두 똑똑하고 유능했지만, 차에서는 조수석에 올랐다.
시정 수뇌부나 기업 경영진에서 여성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성직자 중에도 물론 없었다. 자라면서는 그들의 세상에서 내 자리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남자가 책임지고 여자는 드러나지 않는 조력자로 행동하는 세상이었다. 그러다 아홉 살 때 프리시 씨를 만났다.
프리시 씨는 온 가족의 친구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호피 무늬 옷을 입었는데 슈퍼모델처럼 멋있었고 내 마음을 온통 뒤흔들었다.
“코 수술을 하려고 생각 중이에요.”
프리시 씨가 부끄러운 기색이라고는 전혀 없이 말했다. 우와! 여자가 저런 방식으로 공간을 차지할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게다가 프리시 씨는 그에 대해 사과하기를 거부했다.
프리시 씨 같은 여성이 자기 방식에 따라 편안하게 사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게도 새로운 가능성이 열렸다. 그 후 대학을 벗어나 처음 다닌 교회에서 만난 여성 집사들은 여자-특히 신앙심이 깊은 여자-가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한 내 생각의 폭을 넓혀 주었다. 그다음에는 작가 앤 라모트가 있었다. 라모트는 남편 브랜던과 내가 오스틴에 우리 교회를 열 때까지 매번 조금씩 힘이 되어 주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엄마나 할머니를 사랑했지만 그런 여성상에 고정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창조하신 그대로 내가 열정적이며 재미있고 자조적인 종교 지도자가 되게끔 내 행로에 다른 선생님들을 보내 주셨다. 나는 다른 누구도 될 수 없었다.
승낙을 축하하되 거절도 존중하자
장남 개빈이 열세 살이 되었을 즈음, 에티오피아에서 두 아이 벤과 레미를 입양했다. 하룻밤 사이에 우리는 5인 가족에서 7인 가족이 되었다. 다섯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에 흥분했지만 맙소사! 우리는 정신 없이 굴러가고 있었다. 남편과 나는 마주 보고 말했다.
“아이 각각을 위한 시간을 짜내야 해.”
계획을 짰다. 한 아이가 열세 살이 될 때마다 부모 한 사람이 1대1 특별 여행을 데려가는 거였다. 각 여행의 세부 사항은 달라질 수 있었다. 콜로라도. 뉴욕. 하지만 한 가지 사실은 변함없었다. 바로 ‘찬성’ 여행이었다.
평소라면 엄마가 허락하지 않았을 가파른 폭포를 오르는 하이킹, 디저트 두 번 먹기, 센트럴파크를 관통하는 마차 타기를 개빈에게 허락했다. 레미에게는 삭스 피프스 애비뉴(미국의 고급 백화점 체인‒역주)에서 눈썹을 왁스로 제거하는 일을 허락했다. 자제력과 일반적인 규칙이 필요할 때도 있었지만, 찬성 여행은 그런 게 아니었다. 이런 모험 덕분에 가장 좋은 추억을 얻을 수 있었다.
모든 일에 찬성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찬성은 즐겁다. 하지만 찬성의 이면은 거절이다. 거절이 없다면 약속에 짓눌리고 만다. 내가 어떤 일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는 대부분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적어도 많은 경우에 나는 어느 정도 자격과 열정을 갖추고 있다. 언제나 승낙하고 싶은 유혹이 든다. 하지만 내가 ‘당연하지’가 아니라 ‘억지로 좋아’라고 답하는 일이라면 거절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내가 시들한 긍정의 답을 접어 두면 다른 이가 ‘당연하지’라고 말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다. 덕분에 우리는 모두 전반적으로 가장 크게 공헌할 수 있다.
SPEAK YOUR DREAMS
At 29, I felt a fire in my belly to write a book. I was dreaming up whole paragraphs while driving. I also had three small children, no writing experience and no computer. One day, I said to Brandon, “Instead of having another baby this summer, I think I’ll…write a book.” I might as well have said I was entering a bodybuilding contest for all the sense it made.
But my community rallied behind me. I bought a used computer. Brandon made sure he was home on Friday mornings, and a friend came over one day a week to watch the kids. I also wrote during nap times and late at night. As I wrote, I panicked. I lost 15 pounds. Why had I told so many people about my dream? Now I couldn’t back out. But after four months of keeping my nose to the grindstone, I had a book.
Speaking your dreams doesn’t guarantee success, but it puts gas in the tank. Then you take the next steps: research, brave requests, strategic e-mails, financial investments, a million YouTube tutorials and more. Another term for this is hard work. Unless you are incredibly lucky and privileged, there is no replacement for the real slog of making your dreams happen. But saying your plans out loud is how you first commit to them, and it’s how others know to help.
FIND YOUR PEOPLE
My daughter Sydney was born and raised in Austin. She is grounded, down-to-earth and earnest. In short, she is Texan. When it came time for college, Sydney picked one on the East Coast. Brandon and I said, “Okay, kid” and moved her to Washington, D.C.
Sydney immediately fell in with a group with a lot of razzle-dazzle. Freshmen who sparkled on the page and on social media. About five weeks later, she called and said, “Mom, I think I misread the room. I actually don’t fit this group or this…place. I am more Texan than I thought. I’m scared I missed the window to find my people.”
We talked about how she could find her people. What did she like about her friends from home? Where could she look to meet a new crew? In the end, Sydney realized that Washington, D.C., just wasn’t the right place for her, and she transferred back home to the University of Texas. I was proud of her. She took a risk, and when it didn’t turn out as she hoped, she had the guts to admit it and try something else.
Sometimes community building doesn’t work right away. It might take longer than you want. There can be a few false starts. But finding your people is worth the challenge and vulnerability. Collaborate, partner and share the microphone. Pull folks into your work and see if it doesn’t boost a dozen other levels on your flowchart.
꿈을 이야기하자
스물아홉 살 때 책을 쓰겠다는 야심을 가졌다. 운전하면서 전체 단락들을 창작해 냈다. 어린아이가 셋이었고 집필 경험은 전무했으며 컴퓨터도 없었다. 어느 날 남편에게 말했다.
“이번 여름에는 또 아이를 갖는 대신… 책을 쓸 생각이야.”
거의 말이 안 되는 얘기였으니 차라리 보디빌딩 대회에 나가겠다고 말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날 지원해 주었다. 중고 컴퓨터를 한 대 샀다. 남편은 금요일 오전에 꼭 집에 있었으며, 친구가 일주일에 하루씩 들러서 아이들을 봐주었다. 나도 낮잠 시간과 늦은 밤을 이용해서 글을 썼다. 집필하면서 공황 상태에 빠져서 거의 7kg이나 빠졌다. 왜 그렇게 많은 이에게 꿈을 이야기했을까? 이제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하지만 4개월 동안 열심히 노력한 결과, 책을 출간했다.
꿈을 이야기하는 게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탱크에 연료를 넣는 역할은 할 수 있다. 그러고 나서 다음 단계에 돌입하자. 조사하고 과감하게 요청하며, 전략적으로 이메일을 쓰고 재정적으로 투자하면서 유튜브에 올라온 수많은 독학 동영상을 활용하자. 이것을 다른 말로는 ‘노고’라고 한다. 끝내주게 운이 좋고 특권을 누리는 게 아니라면, 꿈을 이루느라 진짜 고군분투하는 시간은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하지만 큰 소리로 계획을 얘기하는 일이 계획에 전념하는 첫 단계이며, 덕분에 다른 사람들도 도와줄 방법을 알게 된다.
자기 사람을 찾자
우리 딸 시드니는 오스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겉멋이 들지 않았으며 현실적이고 성실하다. 한마디로 텍사스 사람이다. 대학에 진학할 시기가 되자, 딸은 동부의 한 학교를 골랐다. 우리 부부는 “좋아, 우리 딸”이라고 말하고 시드니를 워싱턴 D.C.로 이사시켰다.
시드니는 야단법석으로 가득한 무리와 즉시 어울렸다. 웹페이지와 소셜미디어에서 빛나는 신입생들이었다. 대략 5주 후, 딸이 전화로 얘기했다.
“엄마, 내가 여기 사람들을 잘못 이해한 것 같아요. 사실 나는 이 무리나 여기에… 어울리지 않아요. 생각보다 더 텍사스 사람인가 봐요. 내 사람을 찾을 기회를 놓쳐 버렸을까 봐 두려워요.”
우리는 딸이 어떻게 자기 사람을 찾을 수 있을지 이야기를 나눴다. 딸이 고향 친구들의 어떤 점을 좋아했던가? 어디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리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결국 시드니는 워싱턴 D.C.가 그저 자기와 맞지 않다는 걸 알았고, 집으로 돌아와 텍사스 대학교로 옮겼다. 딸이 자랑스러웠다. 위험을 무릅썼으며 바라는 대로 되지 않았을 때 그걸 인정하고 다른 걸 시도할 배짱이 있었다.
때로 공동체를 만드는 일은 당장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다. 원하는 것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몇 번은 잘못 시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사람을 찾는 일은 그런 어려움과 위기를 감내할 가치가 있다. 협력하고 동업하며 마이크를 공유하자. 사람들을 여러분의 일에 끌어들이고, 덕분에 작업이 몇 단계 상승하지는 않는지 지켜보자.
BE SPIRITUALLY CURIOUS
One of my favorite biblical stories is the parable of the wineskins. It’s just three sentences in the Book of Matthew, but it has helped put to rest some of my fears around spiritual questioning. In biblical days, people used animal skins for wine storage. Over time, after the skins had been used for weddings and feasts, they would become stretched to capacity.
Thus, Jesus explained, “No one puts new wine into old wineskins. For the old skins would burst from the pressure, spilling the wine and ruining the skins. New wine is stored in new wineskins so that both are preserved.” In other words, old containers must be retired because they have given all they can. Otherwise, delicious wine will make a mess on the floor.
Dear ones, the wine is still good. If you are asking hard questions, it is because you love the wine. You believe it is good and worthy of consumption.
Wine is Jesus and the goodness of the Gospel. It has survived. It is flexible. I cannot ruin the whole Jesus experiment with my questions. As I’ve grown, the container that held my faith had to be replaced. I have asked, Is this church a place of spiritual flourishing? Is everyone welcome to participate, serve and lead?
What a wonderful relief to learn that it is allowed—encouraged!—to question your faith with each new chapter in your life.
SHOW UP FOR OTHERS
Helping fix the injustice I see in the world—that’s what drives me. In my early activist work, I made mistakes. Such as when Brandon and I chaperoned groups of teenagers to perform unskilled construction in neighborhoods that, it turned out, did not appreciate our ill-informed attempts to “save” them.
It took me a while to realize that instead of centering myself as the do-gooder main character, I could sit at the feet of the oppressed and listen. I could ask what they needed of me and give it. For example, a group of women at my church spend a day a week at a housing project occupied primarily by immigrants and refugees. The church members just eat and play cards together with the project residents, who are incredibly lonely. They don’t want anything major, just a touch of human kindness. I learned that healthy advocacy looks a lot like love.
During 2018’s Austin Pride Parade, our little church took cues from the Mama Bears, an online support group of thousands of mothers of LGBTQ children, founded by Liz Dyer and expanded by Sara Cunningham, who started the Free Mom Hugs movement. We made posters and T-shirts that looked about as professional as something from a middle school pep rally. They said things like FREE MOM HUGS, FREE DAD HUGS, FREE PASTOR HUGS.
In the August heat, we waited on the sidelines with our arms ready to hug as though it were our paying jobs. There were people who saw our posters and raced into our arms. “I miss this.” “My dad hasn’t spoken to me in three years.” “Please just one more hug.” We hugged until our arms almost fell off, and then we went home covered in glitter, sweat and tears. Showing up for others doesn’t have to be complicated. Plain old-fashioned love is pretty powerful. You just go where love and Jesus take you.
영적으로 호기심을 갖자
내가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는 포도주용 가죽 부대 이야기다. 마태복음에 딱 3문장으로 나와 있지만, 종교적 의문을 둘러싼 공포심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성경이 쓰인 시절의 사람들은 동물 가죽을 이용해서 포도주를 저장했다. 결혼식과 연회에 쓰인 가죽은 시간이 흐르면서 용적에 따라 늘어났을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새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라고 설명하셨다. 다시 말해서 낡은 용기는 줄 수 있는 것을 모두 내주었으니 은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맛있는 포도주가 바닥을 온통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말 것이다.
친애하는 여러분, 포도주는 여전히 무사하다. 여러분이 어려운 질문을 던지는 건 포도주를 아끼기 때문이다. 포도주가 뛰어나고 마실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포도주는 예수 그리스도이자 복음의 미덕이다. 포도주는 무사했고 융통성이 뛰어나다. 내 질문으로 예수님의 모든 경험을 망치지는 못한다. 성장함에 따라 내 신앙을 품은 그릇도 바뀌어야 했다. 나는 ‘이 교회가 영적으로 번창하는 곳인가요? 누구나 자유롭게 참여하고 봉사하고 이끌 수 있나요?’ 같은 질문을 던졌다.
삶의 새로운 시기마다 신앙에 의문을 품는 일이 허용된다는-권장된다!- 점을 알았을 땐 크게 안도했다.
이웃 사랑에 참여하자
세상에서 마주한 불의를 바로잡는 데 일조하는 일은 내게 자극이 된다. 활동가로 일하던 초기에는 실수도 저질렀다. 브랜던과 함께 10대 아이들을 이끌고 동네에서 서투른 건축 기술을 선보였는데, 결과적으로는 그들을 ‘구하려’ 했던 우리의 미숙한 시도를 높이 평가할 수 없었다.
나 자신이 공상적 개혁가로서 일의 중심이 되는 주인공이 되는 대신, 억압받는 사람들의 발치에 앉아서 귀를 기울일 수 있다는 점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사람들이 내게서 무엇을 원하는지 물어보고 그걸 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 교회의 여성 그룹은 이민자와 난민이 다수인 주택 프로젝트를 위해 일주일에 하루를 보낸다. 교회 사람들은 그저 주민들과 함께 먹고 카드놀이를 할 뿐이다. 그들은 굉장히 외로우며 엄청난 것을 바라지 않는다. 인간의 친절함에서 비롯된 손길이면 족하다. 건전한 지지는 사랑과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을 배웠다.
‘2018년 오스틴 프라이드 퍼레이드’ 동안 자그마한 우리 교회는 ‘마마 베어스’를 따라 했다. ‘마마 베어스’는 성소수자 자녀를 둔 수많은 어머니로 이루어진 온라인 협력 단체로서, 리즈 다이어가 창립했고 ‘프리 맘 허그’ 운동을 시작한 사라 커닝엄이 확장했다. 우리는 중학교 응원전 수준의 포스터와 티셔츠를 만들었다. 거기에는 ‘프리 맘 허그, 프리 대드 허그, 프리 패스터(pastor, 목사-역주) 허그’라고 쓰여 있었다.
8월의 열기 속에서 우리는 급여라도 받고 일하는 것처럼 팔로 껴안을 준비를 한 채 사이드라인에서 기다렸다. 포스터를 보고 품으로 뛰어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게 그리웠어요.”
“3년 동안 아빠가 내게 말을 걸지 않아요.”
“딱 한 번만 더 안아 주세요.”
우리는 거의 팔이 떨어져라 안아 주었고 반짝이 가루, 땀, 눈물범벅이 되어 귀가했다. 타인을 위해 참여하는 일은 까다롭지 않아도 된다. 단순하고 전통적인 사랑이야말로 아주 강력하다. 여러분은 그저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끄시는 곳으로 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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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함 181호
Tel. 02-362-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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