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 나눔을 합니다

Guideposts 2021 | 02


Guideposts 2021 | 02

우정 나눔을 합니다

How a woman veteran is turning her struggles into positive action

여기 여성 퇴역 군인이 고난을 긍정적 행동으로 바꾼 방법이 있다.

By SANDY BLAIR, Orcutt, California

샌디 블레어  캘리포니아주 오컷 

Our nation does a lot to honor military veterans. But one group of veterans often gets overlooked.


I should know. I’m a woman and an Air Force veteran. I served for 12 years, until a medical discharge prematurely ended my military career.

Like many veterans, I struggled to gain a foothold as a civilian. I couldn’t find work. After years of structure and camaraderie in the military, I felt alone and adrift. I endured a period of homelessness and sank deeper into despair. 

Women veterans face unique challenges. They are often single parents, as I was. When they leave military service, they frequently take on caregiving roles, as I did, nursing my father after he suffered a stroke. They may encounter discrimination. I was told I was overqualified so many times in my job search, I wondered if race or gender wasn’t the real issue.

My immigrant parents taught me the value of self-sufficiency and hard work. Those values cut both ways. They were a huge help in the military, where I reveled in the discipline and opportunities for advancement. When I struggled after my discharge, I didn’t know how to ask for help. Like many veterans, I thought I should be able to take care of myself.

It was ultimately God who taught me that no one is truly self-sufficient. We all need God’s love. And we all need one another.

That’s the vision that powers the work I do now. I run a nonprofit in central California called Operation WEBS: Women Empowered Build Strong. Our mission is to help women veterans by inviting them into a community of love and mutual support.

우리나라는 다양한 방식으로 퇴역 군인을 예우한다. 하지만 여기서 소외된 집단도 있다. 

바로 여군이다.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여성이며 공군 퇴역 군인이다. 의병 제대로 조기 퇴역할 때까지 12년을 복역했다. 

다른 퇴역 군인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민간인으로서 자리를 잡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일자리를 구하지는 못했다. 오랜 시간 군대의 체계와 전우애에 익숙해진 나는 외로움과 방황 속에 살아갔다. 마땅한 거처 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던 시간을 감내했고, 그러는 동안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다.

여성 퇴역 군인은 보통 흔치 않은 문제들에 직면한다. 그들은 많은 경우 혼자 자녀를 양육한다. 나도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퇴역 후에는 대개 부양의 책임을 진다. 나 또한 뇌졸중으로 쓰러진 아버지를 간호했다. 차별을 당하기도 한다. 내 경우도 일자리를 구할 때 그 일을 하기에는 경력이 너무 과하다는 이유로 수없이 거절을 당해야 했다. 인종이나 성별이 진짜 이유가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미국으로 이민 온 부모님은 내게 자립심과 근면의 가치를 가르치셨다. 살면서 이 가르침은 두 가지 방식으로 도움이 되었다. 특히 군대에서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엄격한 훈련에도 즐거운 마음으로 임할 수 있었고 승급의 기회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제대 후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면서도 나는 도움을 청하는 법을 몰랐다. 많은 퇴역 군인들이 그렇듯 나 또한 스스로 일어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누구도 완전하게 자립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신 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셨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서로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바로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의 동력이 되는 비전이다. 현재 나는 캘리포니아주 중부에서 ‘오퍼레이션 웹스(Operation WEBS: Women Empowered Build Strong)’라는 비영리 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우리의 임무는 여성 퇴역 군인들을 사랑과 상호 협력의 공동체로 초대해 돕는 것이다. 

We started small, with what I call a “stability home” in a town near California’s Vandenberg Air Force Base. It’s a modest four-bedroom residence where women veterans help one another get established and launch into fulfilling lives.

We’re in the process of expanding to a small ranch outside the town. We plan to build several “tiny homes” on wheels, snug single-room residences that can be grouped together into a supportive community.

It’s the kind of place I wish I could have found in the bad old days, when I felt so alone, unable to move forward. Now I give thanks for those days. My struggles back then help me understand what women veterans need now. God turned what appeared to be a dead end into a path toward love and service.

Like my parents, I am an immigrant. My mom and dad, seeking greater opportunity, moved my five siblings and me from Jamaica to New Jersey when I was nine years old. My parents were people of faith and raised us kids that way. I remember my grandmother back in Jamaica giving away the fruit from her trees because she believed God called her to be generous. “The Lord will provide,” she said when I asked what would happen if she ran out of fruit.

My father was a machinist. My mother worked at a hospital and cleaned houses. Both of them were proud and fiercely independent. Dad’s often-repeated motto was: “You get up, you go to work every day and you don’t ask for help.”

처음에는 작은 규모로 시작했다. 우선 캘리포니아 반덴버그 공군 기지 근처의 한 마을에 집을 마련했다. 나는 그곳을 ‘쉼터’라고 불렀다. 방 네 개짜리 소박한 집으로, 여성 퇴역 군인들이 함께 머물면서 사회에 나가 자리를 잡고 충만한 삶을 시작하도록 서로 협력하는 공간이었다. 

현재는 마을 외곽에 있는 작은 목장으로 시설을 확장하는 중에 있다. 그곳에 바퀴 달린 이동식 소형 주택을 몇 채 지을 계획이다. 한데 모인 아늑한 방 한 개짜리 주택들은 협력적인 공동체를 이룰 것이다.

사무치게 외로웠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던 방황의 시절 나에게 꼭 필요했던 그런 공간이다. 지금은 그 시절들을 감사히 여긴다. 그때 겪은 어려움으로 인해 여성 퇴역 군인들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막다른 길처럼 보였던 것을 사랑과 봉사의 길로 바꾸어 주셨다.

나는 부모님을 따라 미국으로 왔다. 내가 아홉 살이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더 큰 기회를 찾아 우리 여섯 남매를 데리고 자메이카에서 뉴저지로 오셨다. 부모님은 신앙심이 깊은 분들이셨고, 우리도 그렇게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자메이카에서 살 때, 할머니가 과일나무에서 과일을 따다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신 것이 생각난다. 너그러운 사람이 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는 거라고 하셨다. 과일이 다 떨어지면 어떻게 되느냐고 묻자 할머니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주께서 예비하실 것이다.” 

아버지는 기계공이셨고, 어머니는 병원에서 일하면서 남의 집 청소 일도 하셨다. 두 분 모두 자부심이 강하고 지독하게 독립적이었다. 아버지가 늘 말씀하신 인생의 모토는 이런 것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매일 일터로 나가고 남에게 도움을 청하지 말라.”

Those values drew me to the military. Dad had taught me how to use tools, and at first I wanted to become an Air Force mechanic. Dad said that was no job for a woman. He advised me to switch to a medical unit, where I trained to become a dental assistant.

I did that work for nearly a decade. After 9/11, I was reassigned to augment military police forces serving overseas.

I planned to be career military. But during my time in service, I developed a powerful allergy to latex. No idea how it happened. The bottom line was, I was unable to wear the protective gear required in certain training and combat situations.

I requested a reassignment, but the training I needed to switch roles wasn’t immediately available. I was discharged in 2005.

Along the way I had married, divorced and had two kids. Suddenly I found myself a single mother in the Florida panhandle. My last assignment had been at Florida’s Tyndall Air Force Base.

I applied for dental hygienist jobs in the area, but I kept hearing the same thing: “Overqualified.” Or I was told my military training didn’t line up with state licensing requirements. I offered to get the necessary certifications, but I was always told no.

I wondered whether race was a factor. I expanded my job search to Orlando, where a close friend lived. Still no luck. I applied for veterans’ benefits, but the paperwork took forever to process.

그러한 가르침 덕분에 군대라는 곳에 끌렸는지 모르겠다. 아버지에게 공구 다루는 법을 배웠던 터라 처음에는 공군 정비병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여자한테는 맞지 않는 일이라면서 의무대에 지원해 보라고 조언하셨다. 그래서 구강 진료 보조병으로 지원해 훈련을 받았다.

나는 10년 가까이 그 일을 했다. 9‧11 테러 이후, 해외에서 복무하는 헌병대를 보강하기 위한 일환으로 자대 재배치를 받았다. 

나는 직업 군인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복무 중 심각한 라텍스 알레르기를 앓았다. 어쩌다 그런 증상이 생겼는지는 모르겠다. 문제는 특정 훈련이나 전시 상황에 반드시 필요한 보호 장비를 착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재배치를 요청했지만 보직 전환을 위해 받아야 하는 훈련을 당장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2005년 제대 명령을 받았다.

그러는 동안 결혼과 이혼을 거쳤고, 두 아이를 맡아 기르게 되었다. 졸지에 싱글맘이 되어 플로리다에 남겨진 것이다. 마지막으로 군 복무를 한 곳이 플로리다의 틴들 공군 기지였다. 

그 지역의 치과 위생사 자리에 지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한결같았다. 

“이 일을 하기에는 경력이 필요 이상으로 많아요.” 

아니면 군대에서 받은 훈련이 주(州) 면허 자격 요건에 맞지 않다고 했다. 필요한 자격증을 따겠다고 해도 모두 거절당했다.

혹시 인종 문제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친한 친구가 사는 올랜도까지 지역을 넓혀 일자리를 찾아보았지만 허사였다. 퇴역 군인 수당을 신청했지만 지난한 행정 절차는 끝날 줄을 몰랐다.

I was running out of money. Finally the kids and I had to move in with my best friend. By that point, I was applying for any job I could find, including fast food. I had been employed every day of my life since high school. Having no job was such a comedown. I hated imposing on my friend. My parents and the military had taught me the same things: discipline, hard work, inner strength. Asking for help wasn’t just humiliating. It felt wrong somehow.

One day, I was out looking for work. Would the kids be better off without me? I wondered. I felt as if I were dragging them down. I was a burden on my friend. A failure.

I thought about how I might end my life. I left God out of this conversation. I was already mad at him. For the first 32 years of my life, I had done everything I was supposed to do. And now I was living like this? What kind of God would allow that? The Lord hadn’t provided after all. Maybe he wouldn’t even care if I killed myself.

My cell phone rang. It was Mom. “Sandy, your father has had a stroke. He is in the ICU. I need you. Can you come home?”

My parents had moved to Georgia. Mom worked at a hospital in Atlanta, and Dad continued as a machinist. He’d had the stroke at work. He was 62.

That call was a God thing. It saved my life. I scooped up the kids and moved in with my parents so I could take care of Dad while Mom was at her job. It was almost unbearable at first, seeing my strong, self-sufficient father so helpless, but I gradually came to value caring for him. Being tender toward this man who had worked so hard for so long.

I went to school to get certified in residential construction, figuring I could find work building houses. Then the 2008 financial crash wiped out the homebuilding market.

Shortly after, a postcard arrived at my parents’ house announcing openings at the DeKalb County Police Department, near Atlanta. Another God thing. I had no idea where that postcard came from, but I had experience in police work.

I passed the departmental exam and for nearly five years served as a DeKalb County police officer. I started on night patrol, leaving the days free to care for Dad. I saw every social problem you can imagine. Driving around the city at night, I had conversations with God about how to help the people I encountered.

돈이 바닥나고 있었다. 급기야 아이들을 데리고 가장 절친한 친구 집에 얹혀사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즈음에는 패스트푸드점을 포함하여 어디든 가리지 않고 일자리를 알아봤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하루라도 일을 하지 않은 날이 없었던 나로서는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이 비참했다. 나는 부모님과 군대로부터 절제와 근면, 그리고 정신력을 배웠다.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단순히 굴욕적인 일이 아니라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일자리를 찾으러 외출을 했다. 

‘내가 아니었다면 우리 아이들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문이 들었다. 엄마인 내가 아이들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친구한테도 짐만 될 뿐이었다. 나는 실패자였다. 

어떻게 생을 마감할지 생각했다. 이런 고민에서 하나님은 배제했다. 하나님께 무척 화가 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태어나 32년 동안 해야 할 일들을 마다하지 않고 다했다. 그런데 고작 이런 꼴로 산단 말이야? 무슨 신이 이래? 주님은 결국 아무것도 예비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고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휴대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샌디, 아빠가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어. 지금 중환자실에 계셔. 네가 와 주면 좋겠다. 올 수 있니?”

부모님은 조지아주로 이사해 살고 계셨다. 엄마는 애틀랜타에 있는 한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고, 아버지도 기계공 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일하는 도중 쓰러지셨다고 한다. 아버지의 나이는 예순둘이었다.

그 전화는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다. 그것이 내 목숨을 구해 주었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님 집으로 들어가 엄마가 일하는 동안 아버지를 간호했다. 강인하고 독립적이던 아버지가 이토록 무력해지시다니. 처음에는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차츰 아버지를 돌보는 일이 소중하게 느껴졌고, 평생을 쉬지 않고 일한 이 사람을 좀 더 다정하게 대하고 싶어졌다.

나는 주택 건축 분야의 자격증을 얻기 위해 학교에 들어갔다. 관련 직종에서 직업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2008년 금융 위기가 닥치면서 주택 건설 시장이 초토화되었다.

그 일이 터진 직후 부모님 집으로 우편물 한 통이 도착했다. 애틀랜타에서 멀지 않은 디캘브 카운티 경찰서에 자리가 났다는 통지서였다. 이번에도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다. 우편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경찰 일을 해본 적이 있었다. 

경찰 시험에 합격한 뒤 디캘브 카운티 소속 경찰관으로 5년 가까이 근무했다. 낮에는 아버지를 간호하기 위해 시간을 비워 두었고, 대신 야간 순찰 업무를 맡았다. 순찰을 하면서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사회적 문제를 두 눈으로 목격했다. 어두운 밤 도시를 순찰하면서 내가 마주친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하나님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My son graduated high school and said he wanted to attend college in California. One of my sisters lived there, in Orcutt, a working-class town near Santa Maria in central California. The kids and I moved in with her. I found work as a real estate agent and an administrative assistant at a community college. Once we were settled, we brought Mom and Dad to live with us.

The kids went off to college. Was I finally in a place to do something about those nighttime conversations I’d had with God while on patrol in Atlanta?

Santa Maria is a world away from Atlanta, but there are a lot of veterans in the area because of the nearby Air Force base and it’s a culture that values military service.

I thought about what I could have used during my time of struggle. A place to live. Help getting veterans’ services. Friendship and support from other people like me.

An idea began to take shape, especially after I learned about an organization called Operation Tiny Home, which builds tiny one-room homes on wheels to help create safe communities for veterans across the nation. What if I built a community of such houses for women veterans?

My sister and I pooled our resources and found a small ranch property just outside the city limits of Santa Maria. I pictured a small group of women veterans living in tiny houses and helping maintain a community garden while getting their lives back on track.

We moved our family to the ranch and converted our house in Orcutt into a stability home. We’re now in the process of raising money to build the tiny house community on the ranch.

Working with the county government, veteran resources and local nonprofit organizations, we began getting referrals of women veterans who needed a supportive place to live. We welcomed our first resident to the Orcutt stability home last year. After living in a local shelter for two years, she was thrilled to have her own room and regular access to a hot bath instead of a community shower.

Since then we have housed a total of seven women ranging in age from 33 to 70. These women have served their country, but they have struggled with military trauma, unemployment, abuse, poverty, addiction and homelessness.

We connect them with veterans’ service organizations and help them find jobs and permanent housing, such as their own apartment. Most of all, we provide them with a safe and supportive environment where they can live with other women veterans who share their military background and understand their difficulties. Everyone helps everyone else reach their goals.

The coronavirus pandemic has disrupted our plans, but I remain committed to our long-term vision. Finances are a struggle for any young nonprofit. It’s been a strain making mortgage payments on both the house and the ranch. I admit, I’m more skilled working with my hands than I am working with money. Asking for contributions goes against my deeply ingrained upbringing.

But I’m learning. When I think back to that difficult time after my discharge from the military, I realize that the hardest part for me was admitting I needed help.

And yet everyone needs help. Especially veterans. Especially women veterans.

I feel blessed to have learned that. To have lived it. And, at last, to be able to do something about it, just like I talked to God about.

아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캘리포니아로 대학을 가고 싶다고 말했다. 내 자매들 중 하나가 오컷에 살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주 중부 산타마리아 근처에 있는 노동자 계층이 주로 사는 동네였다. 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그곳에 사는 언니의 집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부동산 중개업과 커뮤니티 칼리지의 행정 보조 일을 구했다. 자리를 잡은 후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와 함께 살았다.

아이들은 이제 모두 대학생이 되어 집을 떠났다. 마침내 애틀랜타에서 야간 순찰을 돌 때 하나님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실행에 옮길 때가 된 것일까?

산타마리아는 애틀랜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근처에 공군 기지가 있어서 퇴역 군인들이 많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군인을 존중하는 풍토가 있었다. 

제대 후 힘들었던 시절 내게 필요했던 게 뭐였는지 생각했다. 주거 공간, 퇴역 군인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지원해 주는 것, 그리고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끼리의 유대와 지지였다.

‘오퍼레이션 타이니 홈(Operation Tiny Home)’이라는 단체에 대해 알게 된 이후 머릿속 아이디어가 점차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오퍼레이션 타이니 홈’은 바퀴 달린 방 한 칸짜리 소형 주택을 지어 전국의 퇴역 군인들에게 안전한 공동체를 제공하는 단체다. 그렇다면 나도 여성 퇴역 군인들을 위해 그런 공동체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언니와 나는 함께 재원을 마련해 산타마리아시 경계를 바로 벗어난 곳에 위치한 조그만 목장 부지를 매입했다. 소수의 여성 퇴역 군인들이 소형 주택에 살면서 공동 정원을 가꾸고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모습을 그려 보았다. 

우리는 가족을 목장으로 옮겨 살게 하고 오컷에 있는 집을 일종의 쉼터로 개조했다. 현재는 목장에 소형 주택 공동체를 조성하기 위해 기금을 모으는 중이다. 

시청, 퇴역 군인 지원 센터, 그리고 지역 비영리 단체들과 협력하여 주거 공간이 필요한 여성 퇴역 군인들을 소개받기 시작했다. 작년에 오컷에 있는 쉼터에 첫 번째 지원자를 받았다. 2년 동안 한 지역 쉼터에 살았던 그녀는 온전히 혼자 쓰는 방과 공동 욕실 대신 뜨거운 물이 수시로 나오는 공간을 가진다는 사실에 몹시 흥분했다.

이후 33세부터 70세에 이르기까지 총 7명의 입소자를 받았다. 이 여성들은 나라에 헌신했지만, 군대 트라우마, 실업, 학대, 빈곤, 중독 그리고 살 집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우리는 이들이 직업을 구하고 아파트 같은 영구 주택을 마련할 수 있도록 퇴역 군인 서비스 기관에 연결해 주었다. 무엇보다 이들에게 안전하고 협력적인 공동체를 제공했다. 이곳은 군 복무라는 공통의 경험을 가지고 서로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여성들이 함께 살아가는 공간이며, 각자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도록 서로가 서로를 돕는 공간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계획에 차질이 생겼지만 나는 여전히 장기적인 비전에 전념하고 있다. 신생 비영리 단체라면 으레 고질적인 재정 문제를 겪게 마련이다. 오컷의 쉼터와 목장의 대출금을 갚아 나가는 일은 큰 부담이다. 나는 돈을 다루는 일보다 손을 쓰는 일에 더 능숙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기부를 요청하는 것은 내 몸에 밴 가르침에 반하는 일이다.

하지만 배우고 있다. 퇴역 후 힘들었던 시절을 되돌아보면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음을 느낀다.  

누구나 도움을 필요로 한다. 특히 퇴역 군인들은 더욱 그렇다. 그중에서도 여성 퇴역 군인은 도움의 손길이 절실하다.

이 사실을 배울 수 있어서, 그리고 배운 대로 살 수 있어서 감사드린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말씀드렸던 것들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축복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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