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R RETURNING TROOPS
진실을 연주하다
Guideposts 2021 | 03
COMFORT FOOD
Guideposts 2021 | 03
"파이를 만들라"
This Marine veteran was tormented by memories of the Vietnam War.
Learn how music was his salvation
여기 베트남 전쟁에 대한 기억으로 고통에 신음하는 해병대 참전 용사가 있다.
그가 음악을 통해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들어보고자 한다.
BY DON EMBREY, Ladysmith, Virginia
돈 엠브레이 버지니아주 레이디스미스
I pulled a piece of curly maple from a stack at the specialty wood shop. I checked its color, its grain, its sturdiness. This would be the neck of the banjo I was building. It needed to be exactly right. To feel right in my hands, right from the start.
I’d built dozens of banjos over the years, but this one was different. You could say my life’s story would be in this banjo. A lifetime of mistakes, self-destruction and redemption. I wanted this banjo to tell that story, to share my truth, every time it was played.
At last I found the perfect piece. I loaded it into my truck and headed for my workshop at home.
I grew up outside Washington, D.C., not far from where I now live in Virginia. It wasn’t a happy childhood. My dad was a quiet man, a hard worker. But when he drank, he became mean.
I was terrified of ending up like him. As soon as I was old enough, I joined the Marines. The Vietnam War was on, and I landed in the middle of it.
My tour lasted 13 months. I came home haunted by what I’d seen over there. Haunted too by a question: Why did I make it back when so many of my friends didn’t?
I hadn’t realized how strongly public opinion had turned against the war. The first time I went out wearing my uniform, I was taunted and spat on. In the eyes of some people, I was a monster, a killer.
I didn’t know what to think. I had served my country. But I’d also witnessed horrific suffering. Death and destruction. I put my Marine uniform away. I would try to forget all about Vietnam and just move on with my life.
I unloaded the piece of curly maple from my truck and took it to the workshop I’d built behind my house. I set it on a band saw and cut it into the right shape, inhaling the sweet scent of the wood. I sanded it smooth and added a tinted finish, bringing out the rippled pattern in the grain.
I worked odd jobs after the war—gas station attendant, electric company technician. I’d gotten married just before the war, and we had two daughters. I wanted a quiet, normal life.
목재 전문점의 컬리 메이플(목재의 일종‒역주) 더미에서 하나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빛깔, 촉감, 강도를 꼼꼼히 확인했다. 제작하고 있는 밴조의 목에 쓰일 재료였다. 제대로 된 것이어야 했다. 잡았을 때 느낌이 맞아떨어질 것. 처음부터 그래야 했다.
수년간 밴조를 제작했지만 이번은 조금 특별했다. 내 인생 이야기가 이 밴조에 담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생의 실수, 자기 파괴, 그리고 속죄의 이야기가. 이 밴조가 연주되는 매 순간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내 진실이 알려지기를 바랐다.
마침내 완벽한 재료를 찾아냈다. 트럭에 싣고 집에 있는 작업실로 향했다.
나는 지금 살고 있는 버지니아주에서 그리 멀지 않은 워싱턴 D.C. 외곽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은 행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과묵하고 근면한 사람이었지만 술만 마시면 돌변했다.
아버지처럼 될까 봐 겁이 났다. 군에 지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자마자 해병대에 입대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그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13개월간의 군 복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거기서 본 것들로 겁에 질린 채. 그리고 한 가지 의문에 사로잡힌 채. 수많은 전우들은 돌아오지 못했는데 왜 나만 돌아온 거지?
나는 전쟁을 반대하는 여론이 그렇게 거센지 몰랐다. 처음 군복을 입고 나갔을 때 사람들은 나에게 야유를 퍼부었고 침을 뱉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나는 괴물, 살인자였다.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나는 나라를 위해 봉사했다. 끔찍한 고통도 목격했다. 죽음과 파괴의 장면들을. 나는 해병대 제복을 치워 버렸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우고 새롭게 삶을 시작하기 위해 노력했다.
트럭에서 컬리 메이플을 내려 집 뒤에 지은 작업실로 가져갔다. 띠톱 위에 목재를 놓고 알맞은 모양으로 잘랐다. 나무가 풍기는 향긋한 냄새를 들이마셨다. 사포질로 표면을 매끄럽게 한 뒤 목재의 물결무늬가 돋보이도록 바니시 작업으로 마무리했다.
전쟁에서 돌아온 뒤에는 주유소 직원, 전기 회사 기술자 따위의 잡다한 일을 전전했다. 전쟁 직전에 결혼을 했고, 딸도 둘 낳았다. 나는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원했다.
Then my wife got in a car accident; the man I’d become after Vietnam was no good at caregiving. We eventually divorced. I left my family and barely stayed in touch with my daughters.
I found work as an auto mechanic in Annandale, Virginia. One day at lunch, the shop foreman pulled a fiddle from a case and another worker got out a guitar.
“Do you play anything?” the foreman asked me.
“No,” I said. I loved music but had never learned an instrument.
“We could use a banjo,” said the foreman.
The two of them struck up a tune, and something happened inside me. The anguish I’d carried from Vietnam eased. The music was like a salve. I watched and listened, hypnotized by their finger work. Everything went away except the music.
I bought a cheap banjo and taught myself to play. To my delight, music seemed to come naturally. Soon I was playing with the guys at the shop and any chance I got at home.
Our little group got some gigs at bars. We’d play, then stay to drink. Music and booze—what a combination! It blotted out my war memories and my guilt, how I’d treated my family, feelings that boiled right up when the music stopped.
I looked forward to those gigs. In between, I drank alone at home. I’d become just like my dad.
Once the neck of the banjo was complete, I ordered the metal parts from a supplier I trusted in Europe—the tone ring, tension hoop, brackets, tail pieces and tuners. I affixed them to an intact banjo head I’d found online. The only thing left to do was to put everything together, attaching the strings and adding decorative insignia to the head and neck.
For years, my life zigzagged between drunkenness and fitful attempts to start over. I drifted away from the auto shop and the band and stowed my banjo in a closet. I worked construction, remarried, bought some land in Maryland and built a house.
My second wife, Sandi, urged me to join the VFW. She thought talking with other veterans might help. I went to a couple meetings, but hearing other guys talk just brought up the painful memories I’d tried to bury. I came home wanting to get drunk.
Sandi was patient and loving, but she grew dismayed when I relapsed after a rehab program. We separated, and I cursed myself for having ruined another marriage.
그러다 아내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온 뒤로 나는 가족을 부양하는 일을 잘해 내지 못했다. 우리는 결국 이혼했다. 나는 가족을 떠났고 딸들과도 연락을 끊다시피 했다.
버지니아주 애넌데일에 있는 한 자동차 정비소에 정비공으로 취직해 일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 날 점심시간에 정비소 감독이 케이스에서 바이올린을, 다른 직원이 기타를 꺼냈다.
“자네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있나?”
감독이 물었다.
“아뇨.”
내가 말했다. 나는 음악을 사랑했지만 악기는 한 번도 배워 본 적이 없었다.
“밴조 파트를 넣어 줄 수 있네.”
감독이 말했다.
두 사람이 연주를 시작하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베트남에서부터 따라온 극심한 괴로움이 조금 누그러졌다. 음악은 연고 같았다. 나는 최면에 걸린 듯 두 사람의 손가락 움직임을 지켜보며 음악에 귀 기울였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음악만이 남았다.
그길로 값싼 밴조를 하나 사서 독학하기 시작했다. 음악에 타고난 소질이 있는 것 같아 무척 기분이 좋았다. 곧 정비소 직원들의 연주에 동참하고, 집에서도 틈만 나면 연주할 정도의 실력이 되었다.
몇몇 술집에서 공연할 수 있는 기회도 얻었다. 우리는 연주가 끝나면 술집에 남아 술을 마셨다. 음악과 술. 이 얼마나 멋진 조합인가! 그것은 전쟁에 대한 기억, 죄책감, 가족에게 준 상처, 음악이 끝나면 곧장 끓어오르는 감정들을 말끔히 잠재웠다.
나는 공연을 애타게 기다렸다. 공연이 없는 날에는 집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어느새 아버지처럼 되어 갔다.
밴조의 목이 완성되자 믿을 만한 유럽의 업자에게 토운링, 텐션 훕, 브래킷, 테일 피스, 튜너 따위의 금속 부품을 주문했다. 이 부품들을 온라인에서 찾은, 손상된 곳 없이 깨끗한 밴조 헤드에 부착했다. 이제 나머지 부속품들을 조립하고 현을 부착한 뒤 헤드와 목에 장식만 더하면 완성이다.
여러 해 동안 내 삶은 음주와 새 출발을 위한 변덕스러운 시도들 사이에서 비틀거렸다. 정비소와 밴드에서 멀어졌고 밴조도 옷장 안에 넣어 버렸다. 그리고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며 재혼을 했고 메릴랜드에 땅을 사서 집을 지었다.
내 두 번째 아내 샌디는 해외 참전 용사 모임에 들어가 보라고 나를 설득했다. 그녀는 다른 참전 용사들과 교류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두어 번 모임에 나가 보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그토록 묻으려고 애썼던 고통스러운 기억들만 되살아날 뿐이었다. 그런 날은 술에 취하고 싶은 기분으로 집에 돌아왔다.
샌디는 참을성이 많고 다정한 사람이었지만 내가 재활 프로그램을 끝낸 뒤 다시 술에 빠져 지내자 크게 실망했다. 우리는 결국 헤어졌다. 두 번째 결혼도 망쳤다는 생각에 스스로가 저주스러웠다.
I lost my job during the 2008 recession. I drank even more and developed liver disease.
“You have to stop drinking, Don,” my doctor said. “You have Stage III cirrhosis. You’re going to die.”
I drank anyway.
One day, I stumbled out of my stupor long enough to discover a notice of imminent foreclosure in the mail. I was practically broke and had stopped making house payments.
Desperate, I called my older daughter, Dawn. She was grown now, working in real estate. She wasn’t happy to hear from me—we barely talked. But she agreed to help me out of daughterly duty.
“We’ll sell your house before it forecloses and use the money to buy something smaller,” she said. I felt ashamed.
We went together to look at one of those smaller houses. Dawn walked inside, but I stopped on the porch.
“You go on in without me,” I said. “I need a minute.”
I was so sick, just getting out of the car had exhausted me. I stood there feeling utterly defeated. No money. Twice divorced. Estranged from my kids. About to lose the house I’d built myself. Dawn had been buying me food. Even now, all I could think about was my next drink.
There was only one word to describe me: failure.
“God,” I whispered, “please help me.”
Why did I say that? I wasn’t a praying man. Yet at that moment, those words felt like my only lifeline, a crease of light in a door that was about to close forever.
I can’t explain what happened next. It was like that moment when the guys played in the auto shop except on a whole different scale. All of the hatred and disgust I’d felt with myself just melted away. It was quite literally a physical sensation of release, a collapse of all my defenses. I felt vulnerable yet protected. God didn’t excuse what I’d done. He let me know he loved me nonetheless, maybe even more for my brokenness, and forgave me. Unconditionally, so I could forgive myself. I had no choice but to accept that love, that grace. It filled up all the painful places I used to try to drown with alcohol. I felt staggered by a sense of relief. I wept.
“Dad?” Dawn said. “Are you okay? Do you need a drink?”
I was startled to hear myself say, “No.”
2008년 금융 위기 때 직장을 잃고 나서는 술을 더 많이 마셨다. 결국 간에 문제가 생겼다.
“술을 끊어야 해요, 돈. 간경화 3기입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어요.”
의사가 말했다.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술을 마셨다.
술독에 빠져 인사불성으로 지내던 어느 날, 우체통에서 자산 압류 임박 통지서를 발견했다. 나는 사실상 파산 상태였고 집 대출금을 갚지 못하고 있었다.
절박한 심정에 큰딸 돈(Dawn)에게 연락했다. 성인이 된 돈은 부동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동안 연락을 끊다시피 한 아버지의 전화가 반가울 리 없었다. 하지만 자식 된 도리로 도와주겠다고 했다.
“압류 전에 집을 팔고 그 돈으로 더 작은 집을 사드릴 거예요.”
딸이 말했다. 수치스러웠다.
우리는 집을 보러 함께 갔다. 돈이 집 안을 살피는 동안 나는 집 앞 현관에 서 있었다.
“먼저 들어가거라. 난 잠깐 밖에 있다 들어가마.”
내가 말했다.
몸 상태가 너무 안 좋았다. 자동차 밖으로 나오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완전히 패배자가 된 기분으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일푼 신세에 두 번이나 이혼했고 자식들과도 멀어졌다. 게다가 내 손으로 지은 집도 잃었다. 그동안 돈이 먹을 것을 사주었지만 지금 이 순간도 오로지 술 생각뿐이었다.
나를 표현하는 유일한 단어는 ‘실패자’였다.
“하나님, 저 좀 제발 도와주세요.”
나는 속삭였다.
왜 그런 말이 나왔을까? 평소에 기도도 하지 않는데.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그 기도만이 이제 닫히면 영원히 열리지 않을 문에서 새어 나오는 한 줄기 빛, 내 유일한 생명줄처럼 느껴졌다.
그 후 일어난 일들을 설명하기는 힘들다. 정비소에서 두 사람의 연주를 처음 들었던 순간과 비슷했지만,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나 자신에게 느꼈던 그 모든 혐오와 경멸이 눈 녹듯 사라졌다. 문자 그대로 육체의 해방감 같은 것이었다. 나를 둘러싼 모든 방어물이 붕괴되는 듯한 감각. 연약하지만 보호받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은 죄들을 하나님께서 너그러이 봐주신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어쩌면 내 실패들 때문에 더욱더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그리고 나를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셨다. 무조건적으로. 그래서 나도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사랑을, 그 은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랑과 은총이 술로 묻으려 했던 그 모든 고통스러운 곳들을 채워 주었다. 커다란 충격처럼 안도감이 밀려왔다.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빠? 괜찮으세요? 술 한 잔 드시겠어요?” 돈이 말했다.
“아니, 괜찮다.”
그 대답에 나는 무척 놀랐다.
The banjo head arrived. I used my lathe to cut a wooden rim for it, then attached it to the neck. All that remained was the pearl inlay insignia. I’d sent a design to a man I knew in Kentucky. This design was special. It would set this banjo apart from every other one I’d made.
After that day on the porch, my life unfolded in what I can only describe as a series of miracles. No longer poisoned by alcohol, my liver healed. I bought a small house in Virginia and found work in construction. For the first time since Vietnam, I allowed myself to ask why I’d survived.
In other words, what should I do with this life God had given to me?
The answer came in the form of a memory. My old banjo. I found it in the closet. I tuned it but hesitated before picking and strumming. Would I remember? I tried a few chords. I could still play!
But where? Not bars. I needed a different kind of place.
Just a few days later, I was on the phone with a friend when he mentioned a church gospel group that needed a banjo player.
“Well, I’m a banjo player who’s been praying for a gospel group,” I said.
I started playing at the church every Sunday. Standing in front of that congregation, making beautiful music for God, I felt as if I’d come home.
It wasn’t long before I was making my own banjos. I wanted a life filled with music.
The pearl inlay design arrived. I pulled it out of the box.
The inlay consisted of four words, United States Marine Corps, alongside the eagle, globe and anchor of the Marine emblem, which I layered onto the head of the banjo, and a few smaller pieces representing Marine ranks that I used to decorate the neck.
This banjo was a tribute to the Marines. A symbol of my intention to embrace my time in the service. I planned to play it at an upcoming Veterans Day picnic. I was pretty nervous about this particular debut.
I arrived at the picnic and made my way through a crowd of vets and their families to a stage where I would join a volunteer band. I knew what would happen next. People would want to see the banjo. They’d want to talk, to share their memories.
The banjo would make it impossible for me to duck out.
We played a set, and the audience applauded. Afterward people came up to get a closer look at the banjo.
“It’s beautiful,” said one of the folks standing near me. “Where’d you get it?”
“Made it myself.”
Soon I was surrounded. The banjo opened up conversations, honest talk about war. My conflicted feelings about Vietnam turned out to be not so uncommon. War leaves no one unscarred. We are broken by war but made whole by grace.
“Can I take a photo of your banjo?” a woman asked. “It’s for my husband. He’s a Marine in Afghanistan. It will make him so happy to see this.”
Him and me both.
After the picnic, I climbed into my truck and headed home. The banjo lay on the seat beside me. It was the truth teller I had hoped it would be. And at last, so was I.
밴조 헤드가 도착했다. 절단기를 사용해 둥그런 나무 테두리를 만든 다음 밴조 목에 부착했다. 이제 남은 작업은 진주 상감 장식을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켄터키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에게 디자인을 미리 보내 놓았다. 아주 특별한 디자인이었다. 지금까지 만든 밴조들과는 사뭇 다른 밴조가 될 것이다.
그날 집 앞 현관에서의 일이 있고 나서 내 삶은 기적의 연속이라고밖에는 표현할 도리가 없는 방식으로 펼쳐졌다. 더는 술독에 빠져 지내지 않았고, 간도 치유되었다. 버지니아주에 작은 집을 마련했고 건설 현장 일자리도 구했다. 베트남에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내가 살아남은 이유를 스스로에게 질문할 용기도 생겼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나는 기억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바로 오래된 밴조였다. 나는 옷장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조율을 하긴 했지만 연주를 하려니 망설여졌다. 생각이 날까? 코드 몇 개를 시도해 보았다. 연주가 되었다!
그런데 어디서 연주하지? 술집은 안 된다. 다른 장소가 필요했다.
며칠 후, 친구와 통화를 하던 중에 친구가 한 교회 성가대에서 밴조 연주자를 구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마침 성가대에서 연주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밴조 연주자가 바로 여기 있네.”
내가 말했다.
나는 그 교회에서 주일마다 연주했다. 신자들 앞에 서서 하나님을 위해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니 마치 집에 돌아온 것처럼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후 나는 밴조를 직접 제작하기 시작했다. 내 삶을 음악으로 채우고 싶었다.
진주 상감 디자인이 도착했다. 상자를 열었다.
장식물은 ‘United States Marine Corps(미국 해병대)’, 이 네 단어와 해병대의 상징인 독수리, 지구, 닻이었다. 이것들을 밴조의 헤드 위아래로 배치할 것이다. 거기에 밴조의 목을 장식하는 데 쓰곤 하던 해병대 계급을 상징하는 그보다 더 작은 장식물들을 더할 것이다.
이 밴조는 해병대에 바치는 존경의 표시였다. 해병대에서의 시간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내 의지의 상징이기도 했다. 다가오는 재향 군인의 날 야유회 때 이 밴조를 연주할 계획이었다. 특별한 데뷔 무대에 꽤나 긴장이 되었다.
야유회 장소에 도착한 나는 자원봉사 밴드에 합류하기 위해 참전 용사들과 그 가족들 사이를 뚫고 무대로 향했다. 이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미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밴조를 보고 싶어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겪은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싶어 할 것이다.
이 밴조 때문에 나는 도망치지도 못할 것이다.
연주가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후 사람들이 밴조를 더 가까이에서 보기 위해 다가왔다.
“정말 아름다워요. 어디서 사신 거예요?”
근처에 서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물었다.
“제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곧 사람들이 나를 에워쌌다. 밴조 덕분에 전쟁에 대한 진솔한 대화들이 오갔다. 그동안 내가 느꼈던 베트남 전쟁에 대한 상충되는 감정들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대화를 통해 알게 되었다. 전쟁의 상흔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전쟁으로 무너졌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다시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선생님의 밴조를 사진 찍어도 될까요? 제 남편에게 보여 주고 싶어요. 제 남편도 아프가니스탄에 참전한 해병이거든요. 이걸 보면 무척 좋아할 거예요.”
한 여성이 말했다. 나 또한 기분이 좋았다.
야유회가 끝난 후, 나는 트럭을 타고 집으로 향했다. 밴조는 내 옆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것은 내가 바라던 대로 진실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 자신도 진실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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