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의 가족입니다.

Guideposts 2021 | 05


Guideposts 2021 | 05

우리는 그의 가족입니다

This woman opens her home and heart to foster veterans, 

but there was one she feared she’d never reach

이 여성은 참전 용사들을 돌보기 위해 자신의 집과 마음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이 끝내 닿지 못할까 걱정했던 한 참전 용사가 있었다.

BY LYNN RUFING, Greenville, Indiana

린 러핑  인디애나주 그린빌

I sat beside the elderly veteran’s bed in the hospice unit. Watching him struggle to draw breath, I felt an ache in my own chest. Lord, am I really helping? I’d been so sure I was on the right path, a path the Lord had set me on, but now I wondered.

Until he’d moved into hospice, this Vietnam veteran—I’ll call him Robert—had been living with my family as part of the U.S. Department of Veterans Affairs medical foster home program. Taking care of these men—cooking for them, helping them with daily activities, providing a safe and stable home—was my job. Although we’d welcomed Robert into our house more than two years earlier, I’d always felt  some friction between us. He and I had never really been able to see eye to eye.

Maybe I’d tried to get too involved. “Don’t you think you’ve had enough sugar?” I’d ask, watching him guzzle his third soda. He’d been homeless for many years, and his health was precarious. He didn’t eat well or take his medications on time. I hovered, worried he might slip away, dabble in alcohol and other harmful substances. I wanted so badly to support him, to help him live his best life.

Robert would bristle. “I’m 75 years old. I know when I’ve had enough.”

That stung.

나는 노쇠한 참전 용사가 누워 있는 호스피스 병동의 병상 옆에 앉아 있었다. 숨 쉬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그의 모습을 보자니 가슴이 미어졌다. 

‘주님, 제가 정말 이분께 도움이 되고 있나요?’ 

나는 옳은 길을 걸어왔다고 확신했다. 주께서 나를 위해 내려 주신 길이라고 굳게 믿었던 길을. 하지만 이제는 의구심이 들었다.

베트남 참전 용사인 그는‒그를 로버트라고 부르겠다‒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하기 전까지 우리 가족과 함께 살았다. 미국 보훈부에서 주관하는 의료 위탁 가정 프로그램의 일환이었다. 이 사람들을 돌보는 일, 이를테면 식사를 제공하고 일상적인 활동을 보조하며 안전하고 편안한 집을 제공하는 역할이 내 일이었다. 2년여 전 우리 집으로 온 로버트와 나 사이에는 늘 마찰이 존재했다. 우리 두 사람은 의견의 일치를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내가 너무 간섭했는지도 모르겠다. 

“로버트, 당 섭취는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세 번째 탄산음료를 벌컥벌컥 들이켜는 그를 바라보며 내가 물었다. 오랫동안 노숙자로 살아온 그의 건강 상태는 위태로웠다. 그런데도 그는 잘 먹지도 않을뿐더러 약도 제시간에 챙겨 먹지 않았다. 나는 그가 사라질까 봐, 그래서 술과 다른 해로운 약물에 손을 댈까 봐 노심초사하며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를 지지하고, 그가 최고의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내가 도움이 될 수 있기를 정말 간절히 바랐다. 

그러면 로버트는 발끈하고는 했다. 

“내 나이가 일흔다섯이야. 충분한지 아닌지는 내가 더 잘 알아.”

그 말에 나는 기분이 상했다. 

Caring for veterans felt like my second calling, but the work wasn’t cut-and-dried. Each veteran needed a different type of care and sought different levels of integration with our family. Some loved being a part of the life my husband and I had built with our daughters. Others kept more to themselves.

I started running a medical foster home in 2014, believing I could save every veteran who came to us—treat whatever ailed them and heal them of their pain, both physical and emotional. I was a nurse, after all—I’d spent 24 years working at an Indianapolis hospital’s bone-marrow transplant unit. And nurses are fixers.

My husband, Todd, and I had adopted three sisters from the foster care system in 2011. We’d met the girls while our friends were fostering them. My friend called me one day and said, “I don’t think God wants us to adopt these girls into our family. I think we’re being led on a different path.”

I was heartbroken for the girls. They were so sweet and funny. I was 46 and had never had children of my own. It just hadn’t happened. But maybe being a mom wasn’t out of the question.

“Todd, what if we adopted those girls?” I said.

We decided to go for it. We knew we’d have to make some big adjustments. I loved my job at the hospital in Indianapolis, where I’d lived during my first marriage. I’d stayed on there even after I’d married Todd and moved to rural Greenville, 125 miles away. But I couldn’t do the two-and-a-half-hour commute anymore. Not while raising three girls under the age of 10.

참전 용사를 돌보는 일은 나에게 주어진 두 번째 소명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 일은 결코 칼로 무 자르듯 간단하지 않았다. 참전 용사마다 필요한 돌봄의 종류가 달랐고, 그들이 원하는 우리 가족과의 융화 정도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나와 남편, 그리고 우리 딸들이 일군 삶의 일부로 기꺼이 들어온 반면, 우리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2014년 의료 위탁 가정 프로그램을 처음 시작했을 때는 우리에게 오는 모든 참전 용사를 구제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들이 무슨 병을 앓고 있든 전부 고쳐 주고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육체의 병이든 정신의 병이든 간에 말이다. 

어쨌든 간호사 출신 아닌가. 나는 24년 동안 인디애나폴리스에 있는 한 병원의 골수 이식 센터에서 근무했다. 결국 간호사는 고쳐 주는 사람이니까. 

내 남편 토드와 나는 2011년 가정 위탁 제도를 통해 세 자매를 입양했다. 원래는 친구가 위탁 양육을 하고 있던 아이들이었다. 어느 날 친구가 연락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 생각에는 말이야, 하나님께서 이 아이들이 우리 가정의 일부가 되는 걸 원치 않으시는 것 같아. 우리를 다른 길로 인도하신다는 생각이 들어.”

아이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정말 사랑스럽고 유쾌한 아이들이었다. 당시 내 나이가 마흔여섯이었는데 우리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어쩐 일인지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그래도 엄마로 사는 게 터무니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보, 우리가 그 아이들을 입양하면 어때요?” 

내가 말했다. 우린 입양을 추진하기로 했다. 물론 기존의 생활 패턴에 엄청난 변화가 있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나는 인디애나폴리스의 한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는 것을 사랑했다. 첫 번째 결혼생활을 인디애나폴리스에서 했고, 토드와 재혼한 뒤에도 한동안 거기서 살았다. 그러다 200km가량 떨어진 그린빌이라는 시골 마을로 이사했다. 하지만 열 살도 안 된 세 아이를 돌보면서 왕복 2시간 반이나 걸리는 거리를 통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I don’t know what to do,” I told Todd one night. “I want to stay home, but we need the money.”

“Why not try doing what my mom does?” he said.

Todd’s mother, who used to own a bed-and-breakfast in Greenville, had been running a medical foster home for veterans for the past eight years. It was a 24/7 job—many of the men had complex medical issues and couldn’t live alone—but my mother-in-law found deep meaning in it.

It seemed like the perfect solution for our family. I could stay at home with our daughters while using my nursing skills and earning income.

“This is our chance to do what Christ asks of us,” I explained to my girls. “To love our fellow human beings. To take care of heroes.”

They had their doubts, but I had faith that God wouldn’t give us more than we could handle. Our large three-story home had a walk-out basement with two bedrooms and two bathrooms. The plan was to have the veterans live down there. They had call buttons they could push if they needed anything. I’d cared for thousands of critically ill patients. I was confident in my ability to manage our new fosters. Maybe a little too confident.

Our first veteran came to live with us in 2014. Right away, he made it clear that he had no interest in my managing his daily life. We didn’t hear a peep out of him the whole first week. When he finally emerged from downstairs, looking a bit haggard, he didn’t want to chat. Was I doing something wrong?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여보. 집에 있고 싶지만 돈이 필요하잖아요.” 

어느 날 밤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 어머니가 하신 대로 해보면 어때요?” 

남편이 말했다.

그린빌에 민박집을 소유하고 있던 시어머니는 지난 8년 동안 참전 용사를 위한 의료 위탁 가정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계셨다. 휴일 없이 밤낮으로 해야 하는 일이었다. 맡겨진 사람들은 복합적인 질병을 가지고 있어서 혼자 살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시어머니는 그 일에 큰 의미를 두었다. 

완벽한 해결책 같았다. 딸들과 집에 함께 머무르면서 내 간호 기술도 발휘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 같아. 영웅들을 돌봄으로써 인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 말이야.” 

나는 아이들에게 설명했다.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은 주시지 않았을 거라 굳게 믿었다. 마침 우리가 살고 있는 3층짜리 커다란 집에는 침실과 욕실이 2개씩 딸린, 지상으로 출입문이 난 지하실이 있었다. 참전 용사들은 거기서 지내면 될 것이다. 필요할 때 언제든지 누를 수 있는 호출 벨도 방마다 있었다. 나는 병원에서 위중한 환자 수천 명을 간호했다. 새로운 가족들을 돌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자신감이 너무 지나쳤는지도 모르겠다.

2014년에 첫 번째 참전 용사를 맞았다. 그는 들어오자마자 내가 자신의 일상을 관리하는 데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뜻을 분명히했다. 그러고는 그 주 내내 두문불출했다. 살짝 초췌한 모습으로 마침내 지하실에서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여전히 말을 주고받을 생각이 없었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걸까?

Still, I was determined to treat him like family, even while giving him the space he wanted. He started eating meals with us, telling us a bit about his personal life. We invited him to church with us on Sundays. He never came, and I never pushed, but I made sure he knew he was welcome.

My daughters took an interest in him too. They’d go downstairs on Saturdays to knock on his door. Yanet, my oldest, would ask, “Do you want to play board games with us?”

The VA provided a lot of support. The program coordinator visited us each month. VA physical and occupational therapists helped the veteran stay mobile, and a recreational therapist brought crafts and musical instruments.

We got into the swing of things and agreed to take in another veteran. The program limits caregivers to three veterans at a time, and I could see why. Between raising our girls and coordinating the veterans’ medical and therapy appointments, visits to the VA and other activities, I was exhausted.

To make matters more complicated, our second veteran was a 90-year-old with dementia who’d served in World War II. “I don’t feel comfortable keeping somebody with dementia downstairs,” I said to Todd. “What if he wanders off?”

We turned our living room into another bedroom. Todd put up walls for privacy, but because it’s on the main floor, it allowed the veteran to be a part of everything going on in the house.

“I’m not sure I can do this alone,” I said to Todd one day. “Would you be willing to give up your landscaping business to help me?”

Todd agreed. Running a medical foster home became a second career for both of us.

Still, I worried that our daughters would resent sharing more living space with our guests. One morning at breakfast, I asked, “How are you girls getting along with our newest veteran?”

Yanet grinned and said, “It’s like having a new grandpa!”

The veterans stayed with us until they opted for another living situation or passed on. Robert came to us in November 2017. Darryl, an Army veteran, moved into the main floor bedroom in November 2019. He’d lost both legs due to diabetes and used a wheelchair. He settled into our family right away, bantering with the girls, chatting with me as I cooked. I felt like I was hitting my stride. Every day, I was up at 5 A.M., preparing one veteran for dialysis, helping Darryl with his wheelchair, organizing meds, getting the girls off to school. This is what God made me for, I thought. I was still exhausted but joyously so.

그래도 나는 그가 원하는 대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그를 가족처럼 대하기로 결심했다. 우리와 식사를 함께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사적인 이야기도 조금씩 했다. 주일에는 우리가 다니는 교회에 그를 초대하기도 했다. 그 초대에 응한 적은 없지만 나도 특별히 강요하지 않았고, 대신 언제든 환영한다는 뜻은 분명히 전했다.

딸들도 그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토요일이면 아이들은 지하실로 내려가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그러고는 큰딸 야넷이 물었다. 

“아저씨, 저희와 보드게임 하실래요?”

보훈부에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프로그램 담당자가 매달 집을 방문했고, 보훈부 소속 물리 치료사와 작업 치료사가 참전 용사가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왔으며, 오락 치료사는 수공예품이나 악기를 가져왔다. 

어느 정도 일에 능숙해지자 참전 용사 한 명을 더 받기로 했다. 프로그램 규정상 한 번에 세 명까지만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참전 용사들의 병원이나 치료 예약, 보훈부 방문과 나머지 여러 활동들을 조율하는 것은 여간 고된 일이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새로 들어온 분이 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로 90대의 고령에 치매를 앓고 있었다. 

“여보, 치매를 앓고 있는 분을 지하실에서 지내시게 하는 게 편치 않아요. 길을 잃고 헤매시면 어떡해요?”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우리는 거실을 방으로 개조했다. 사생활 보호를 위해 남편이 벽을 세웠다. 하지만 집 안의 중심에 있다 보니 본의 아니게 그는 우리 집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일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보, 저 혼자 이 일을 하기에는 너무 벅차요. 당신 조경 사업을 접고 저를 도와주는 게 어때요?”

남편은 내 뜻에 따라 주었다. 그리하여 의료 위탁 가정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일은 우리 부부의 두 번째 직업이 되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아이들이 손님과 공간을 함께 쓰는 것에 거부감을 가질까 걱정이 되었다. 어느 날 아침식사를 하면서 내가 물었다. 

“얘들아, 이번에 들어오신 할아버지하고는 어떻게 지내고 있니?”

야넷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새로 생긴 것 같아요!”  

이분들은 다른 생활환경으로 옮겨 가거나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와 함께 살았다. 로버트는 2017년 11월에 우리 집으로 왔다. 2019년 11월에는 육군 참전 용사인 대럴이 들어와 중앙 거실에 있는 침실을 쓰게 되었다. 그는 당뇨로 두 다리를 잃어 휠체어 생활을 했다. 대럴은 우리 집에 곧바로 적응해 아이들과 농담도 주고받고 내가 식사 준비를 할 때는 나와 수다도 떨었다. 나는 생활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생각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한 분의 신장 투석을 준비하고 대럴이 휠체어 타는 것을 도와준 다음, 각종 약을 준비한 뒤에는 아이들 등교 준비를 했다. 

‘이게 바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임무야.’ 

나는 생각했다. 일은 여전히 고되었지만 마음만은 즐거웠다.

In late winter 2019, Robert took a turn for the worse. He was suffering the long-term effects of COPD, and it became clear he wouldn’t last much longer. When he told me he wanted to go into hospice care rather than stay with us, I tried not to take it personally. 

Robert had no family of his own and few friends. No matter how hard I tried to connect with him, he and I never quite clicked. I kept reminding myself that his wartime experiences and years of homelessness had left him with scars I couldn’t begin to understand. That I couldn’t expect to form a bond with every veteran.

Not long after he moved out, I went to visit him in the hospice unit. He looked so frail and alone, lying there in his bed, struggling to breathe. I took pride in my work as a nurse and as a caregiver, but Robert didn’t want any part of it. He didn’t want to be in our house when he passed, even though it was the only home he’d known in many years. Had anything I’d done even helped him?

I pulled my chair closer to Robert’s bed. “I just wanted to see how you’re doing,” I said.

A light flickered in his eyes. At least he didn’t seem upset I was there.

Robert took a shaky breath. “Lynn, I changed my mind,” he said. “I want to be with you when it happens. I know you and the family love me. Please take me home.”

I almost broke down right there. I’d spent the past few years thinking Robert resented my attentiveness and attempts to help. I thought I’d failed as a caregiver, that I wasn’t meant to do this. I get it now, Lord, I prayed on the drive home. He wasn’t asking me to fix all of our veterans’ problems but to provide what they needed most: love and care.

My family and I did our best to make Robert comfortable during his last weeks. Every night, he hugged me and I’d kiss his forehead.

“I love you,” I said, and I meant it.

I let the girls miss school to attend his funeral. We drove to the veterans’ cemetery. Would we be the only ones there? Robert had no family to notify of his death. A life of service, I thought, and no one but us to mourn his passing.

I stopped in my tracks. Fifty people in dress uniform waiting for us. A full military burial.

“Are you his family?” the chaplain asked. We were the only civilians.

“We’re his medical foster—” I started to say. Then I looked at my girls. “Yes. We’re his family.”

2019년 늦은 겨울, 로버트의 병세가 악화되었다. 만성 폐색성 폐질환으로 오랜 투병 생활을 한 그는 이제 더는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가 호스피스 병원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 말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로버트는 가족도 없고 친구도 거의 없었다. 내 편에서 그와 가까워지려고 갖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우리 둘은 가까워지지 못했다. 참전 경험과 수년간의 노숙 생활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상처들이 있는 거라고 나 자신에게 수없이 상기시켰다. 어떤 참전 용사와도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고. 

그가 병원으로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호스피스 병동으로 그를 찾아갔다. 병상에 누워 힘겹게 숨을 쉬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연약하고 외로워 보였다. 간호사로서, 그리고 돌봄 제공자로서 나는 내 일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로버트는 그 어떤 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 집에서 임종을 맞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로서는 수년 만에 가져 본 유일한 보금자리였는데도 말이다. 여태껏 내가 해온 일이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을까?

나는 로버트가 누워 있는 병상 가까이로 의자를 끌어당겼다.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해서 왔어요.” 

내가 말했다. 그의 눈에서 순간 빛이 났다. 다행히 나의 방문을 언짢아하는 것 같진 않았다. 

로버트가 위태로운 숨을 쉬었다. 

“린, 마음이 바뀌었어. 그 일이 일어날 때 자네와 함께 있고 싶어. 자네와 자네 가족이 나를 사랑한다는 거 알아. 날 집에 데려다줄 수 있겠나.”

북받치는 감정을 겨우 억눌렀다. 지난 몇 년 동안 로버트가 내 관심과 도움을 불쾌하게만 여겼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돌봄 제공자로서 실패했고, 이 일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제 알았어요, 주님.’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렇게 기도했다. 로버트는 그들이 겪고 있는 모든 문제를 내가 고쳐 주기를 바란 것이 아니라 단지 그들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 즉 사랑과 보살핌을 원했던 것이다.

세상을 떠나기 전 몇 주 동안 우리 가족은 로버트가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매일 밤 그는 나를 포옹했고, 나는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요.” 내가 말했다. 진심이었다. 로버트의 장례식 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함께 참전 용사 묘지로 향했다. 우리밖에 없을까? 임종을 알릴 가족이 로버트에게는 없었다. 

‘나라에 몸 바쳐 싸웠는데 애도할 사람이 우리뿐이라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제복을 입은 쉰 명의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식 군장(軍葬)이었다. 

“로버트 씨의 가족 되십니까?” 

목사님이 물었다. 민간인은 우리뿐이었다.

“저희는 로버트의 위탁 가족….” 

내가 입을 열었다. 그러다 아이들을 바라보고는 이렇게 대답했다. 

“네, 저희는 그분의 가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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