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vercoming Grief

아버지의 기도

Guideposts 2021 | 06

Overcoming GriefHealing

Guideposts 2021 | 06

아버지의 기도

I thought I knew my father well: his devotion to family, his solid faith.

A slip of paper in a forgotten Bible revealed more

아버지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가족에 대한 헌신, 단단한 믿음. 

잊힌 성경책에 끼워져 있던 한 장의 종이가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By RICK HAMLIN, Contributing Editor

릭 햄린  편집자 

We were cleaning out Mom’s house in Pasadena in the weeks after her death. Dad had died nine years earlier, so I pretty much figured I had gone through the grieving process, understanding who he had been and accepting the loss.

Then I discovered a Bible on a bookshelf. Not one that Mom ever used, not particularly dog-eared either. Just a book on a shelf, one of many. Everybody had claimed their favorites, and my three siblings and I were packing up the rest to give to the library for their annual fundraiser. None of us really needed another Bible.

Before putting it in the giveaway box, I dusted it off, flipping idly through the unmarked pages. It was a newish edition, published in the 1990s, a fine leather cover. Not signed. No EX LIBRIS bookplate. Not anyone’s beloved copy.

Then out slipped a scrap of yellow lined paper with writing on it. I recognized the handwriting immediately. Dad’s. Everything in uppercase letters, the sort of thing I knew so well from the clippings he would often send with a Post-it note: “Thought you’d enjoy this” or “Reminded me of you” or “Got a chuckle out of this” and almost always ending with his frequent refrain to all four of us kids: “I’m proud of you! Love ya.”

Dad was proud of us. Nice to remember that right now. I wondered if this note were some other upbeat message. But, no, the words were addressed to the divine. “Father God,” it began. “As you know, I rejoice in wife, children, grandchildren, close friends, colleagues, companions and the warm love of Jesus....”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몇 주 지나서 우리는 패서디나에 있는 어머니의 집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9년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에 나는 아버지가 어떤 분이셨는지 이해하고 있고 아버지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애도 과정을 충분히 거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서가에서 성경책 한 권을 발견했다. 어머니가 사용하시던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페이지 모서리가 접힌 데도 없었다. 여러 권의 성경책 중 서가에 있는 한 권이었다. 우리 네 남매는 각자 좋아하는 책을 고른 후 남은 것들을 도서관의 연례 모금 행사에 기부하기 위해 포장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성경책이 더 필요하지 않았다. 

그 성경책을 기부 상자에 넣기 전에 나는 먼지를 털어 내고 아무런 표시도 되어 있지 않은 책장들을 목적 없이 넘겼다. 1990년대에 출판된 비교적 최신판이었고 질 좋은 가죽으로 장정되어 있었다. 서명도 없고 장서표도 없었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책이었다.

그때 줄이 그어진 노란색 종이 한 장이 빠져나왔다. 뭔가 적혀 있었다. 글씨체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아버지의 것이었다. 글자는 전부 대문자로 쓰여 있었다. 생전에 신문이나 잡지 따위에서 오려 낸 기사를 간단한 메모와 함께 우리에게 보내 주시곤 했기 때문에 너무나 익숙한 글씨체였다. 포스트잇에 쓰인 메모는 “네가 이걸 좋아할 것 같았다”라든지 “네 생각이 나더구나” 혹은 “이걸 읽고 낄낄 웃었다”와 같은 것이었고, 거의 언제나 우리 네 남매에게 항상 하시는 이 말씀으로 끝이 났다. “네가 자랑스럽구나! 사랑한다.”

아버지는 우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셨다. 지금 그 사실을 떠올리니 기분이 좋다. 이 노트에 적힌 글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경쾌한 메시지일지 궁금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 보내는 기도였다. “하나님 아버지.” 글은 이렇게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저에게는 아내와 아이들, 손주들, 가까운 친구들, 동료, 동반자들, 그리고 예수님의 따뜻한 사랑이 있습니다….”

I smiled. Sounded like one of Dad’s rambling graces at dinnertime, a rehash of news he’d picked up on the radio on his commute home, maybe a petition or two for us, an exam coming up or a piano recital or drill team tryouts, always concluding with mention of Mom’s meatloaf or mac and cheese (getting cold while we waited): “Bless this food to our use and the hands that prepared it.” There was so much info in his graces that one family friend dubbed them the Six O’Clock News.

But this prayer went on at a much deeper, more personal level. And it broke my heart.

“Why do I suffer from lack of self-confidence?” Dad had written. “Why do I see the negatives and shortcomings in my everyday life? Why call up shortcomings when I have so much confidence in those I love and rejoice about!!” Double exclamation point. Why, indeed?

I looked at the date scrawled at the top of the page. He’d written these words when he was in his early seventies, after an impressive career. He’d been a professional fundraiser, dedicated to causes he cared about. He’d volunteered for the Pasadena Tournament of Roses, becoming president and leading the Rose Parade in 1983(with all of us in tow). When the Olympics came to Los Angeles the next year, he ran the sailing venue, having been an award-winning yachtsman himself. Lacking confidence? It didn’t make any sense.

Then I thought about his drinking in the evenings and how impatient it made me. The glass of scotch or vodka before dinner that seemed to be on constant refill the rest of the night, long after Mom had gone to bed. He’d call me in to watch a basketball game on TV and then unload about a conflict at work or a colleague he was afraid he’d disappointed or someone who’d inadvertently hurt his feelings. “Don’t be so sensitive,” I wanted to say, the sort of thing that Mom would say to me.

나는 미소를 지었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아버지가 하시던 두서없는 기도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기도는 퇴근길에 라디오에서 들었던 뉴스 한 토막이나 다가오는 시험이나 피아노 공연, 혹은 시범 부대 선발을 앞둔 우리를 위해 하시는 한두 가지의 소원, 그리고  어머니가 만든 (기다리는 동안 식어 가는) 미트로프나 맥앤치즈의 언급으로 항상 끝이 났다. 

“저희의 일용할 양식과 그것을 준비한 손에 축복을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기도에는 너무나 많은 정보가 들어 있어서 가족의 친구 한 분이 ‘6시 뉴스’라고 이름을 붙일 정도였다.

하지만 이 기도는 훨씬 더 깊고 내밀했다. 그리고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어찌하여 저는 자신감 부족으로 고통받고 있을까요? 왜 일상에서 부정적인 것들과 단점들만을 보는 걸까요? 제가 사랑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에게는 그토록 큰 자신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왜 결점을 생각하는 걸까요!!” 

느낌표가 두 개였다. 그러니까, 왜요?

페이지 위쪽에 휘갈겨 쓴 날짜를 보았다. 70대 초반에 쓰신 글이었다. 경력을 화려하게 마무리하신 뒤였다. 아버지는 당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명분에 충실한 기금 모금 전문가였다. 패서디나 로즈 퍼레이드에서 자원봉사로 회장직을 맡아 1983년부터(우리 네 남매를 모두 데리고) 행사를 이끌었다. 이듬해 LA에서 올림픽이 열렸을 때는 요트 경기장을 총괄하셨다. 아버지 본인도 수상 경력이 있는 요트 선수였다. 그런데 자신감이 결여되었다고?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문득 아버지가 저녁마다 술을 마시던 모습과 그 모습이 나를 얼마나 초조하게 만들었는지가 떠올랐다. 저녁식사 전부터 채워져 있던 스카치나 보드카 잔은 어머니가 잠자리에 드신 지 한참 지난 늦은 밤까지 끊임없이 채워졌던 것 같다. 가끔 농구 게임을 같이 보자며 나를 부르시고는 직장에서의 갈등, 당신이 실망시킬까 걱정하던 동료, 또는 무심코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한 누군가에 대해 털어놓으셨다. 

“너무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마세요.” 

나는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가 나에게 하시던 말이었다.

Sensitive, like me. Did that have to be so bad? Was that the reason for all his self-medicating? Dad never drank during the day, only at night, at home. An alcoholic, I’d come to realize. Highly functional but one nevertheless.

Putting that down, even now, feels like a terrible transgression. It’s not as if we kids hadn’t discussed it, dealing as we had with one beloved in-law’s struggle with addiction and how she found help in Alcoholics Anonymous. Somehow, though, Dad could never bring himself to do that, even as he revealed here—with heartbreaking honesty—his crippling vulnerability.

I looked up at old family photos still on the walls and shelves, mementos from his childhood. There was that sweet picture of his mother and siblings—what a wonderful grandmother she was—and those shots of the submarine he’d served on during World War II.

That was it, I tried to tell myself. Being a 19-year-old kid on a submarine somewhere in the Pacific, depth charges exploding in the dark waters around you while you desperately tried to escape the Japanese convoy you’d just attacked. At any moment, the sea could come crashing in on you. Circumstances like that would have been traumatic, wouldn’t they? The one time—on a family trip to Pearl Harbor—that I’d stepped onto a submarine like the one he’d served on, I found it horribly claustrophobic. And I was on board for only a few minutes, not the many months Dad had been.

I wanted to find some primal trauma to blame this insecurity on. Could it have been those teenage years when his mother had almost died of breast cancer? That torturous summer when he was farmed out to friends at the beach, not knowing how his mother would come through surgery at a time when the word cancer was rarely spoken, just whispered?

Yes, that could have exacted a lifelong emotional toll, but I kept circling back to his hand around that glass of scotch or vodka. And his inner pain.

Dad’s letter, Dad’s prayer, said something that was at the heart of his personality. He struggled every day. Whenever we got upset about something, Mom would say, “Just let your feelings go and move on.” She did. But Dad battled his feelings. It never stopped him from being a good husband, a devoted father, a loyal colleague, a man of faith. In fact, maybe that very vulnerability gave him the power to be the person he was, rooting for the underdog. Asking God, as he wrote here at the end, “Get rid of the baggage. Do it now!”

예민하다, 나처럼. 그런데 그렇게 심각하셨나? 그래서 그런 자가 치료가 필요하셨나? 아버지는 낮에는 절대 술을 드시지 않았다. 오로지 밤에, 집에서만 드셨다.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다. 일상생활을 하는 데 아무런 문제는 없었지만 그래도 중독은 중독이었다. 

그 단어를 적는 지금도 엄청난 죄악처럼 느껴진다. 알코올중독으로 고생하던 우리 배우자의 가족 중 한 사람과 AA(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에서 그녀가 어떻게 도움을 받았는지 우리 네 남매가 함께 이야기를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쩐지 아버지는 이 노트에 자신의 상처받기 쉬운 성격을 고백할지언정‒마음이 아플 정도로 솔직하게‒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벽과 선반에 여전히 있는 오래된 가족사진을 올려다보았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이 담긴 기념품이었다. 그중에는 할머니와 아버지 남매들이 함께 찍은 다정한 사진도 있었다. 할머니는 얼마나 멋진 분이었나! 2차 세계 대전 중에 아버지가 복무하던 잠수함 사진도 몇 장 보였다. 

바로 그거였다. 나 자신에게 이야기해 보았다. 태평양 어딘가를 잠행하는 잠수함에 19세 소년이 있다. 방금 공격한 일본군 호송대를 피해 필사적으로 후퇴하는 도중 너를 둘러싼 캄캄한 물속에서 폭뢰가 폭발한다. 금방이라도 바닷물이 너를 덮칠지도 모른다. 그런 일을 겪으면 충분히 트라우마가 남지 않겠는가? 진주만으로 가족 여행을 떠났을 때 아버지가 탔던 것과 비슷한 잠수함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무시무시한 밀실 공포증을 느꼈다. 아버지가 그 안에 계셨던 수개월이 아니라 들어간 지 단 몇 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느꼈던 불안의 원초적인 트라우마를 찾고 싶었다. 할머니가 유방암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아버지의 십대 시절이었을까? ‘암’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못하고 그저 쉬쉬하던 시절에 할머니가 수술을 받고 살아남을지도 알지 못한 채 해변가의 친구들 집에 맡겨졌던 그 끔찍한 여름이었을까? 

그래, 그런 일을 겪으면 평생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자꾸 스카치나 보드카 잔을 든 아버지의 손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버지의 내면의 고통으로.

아버지의 편지, 아버지의 기도는 아버지 성격의 본질 같은 것을 말해 주었다. 그는 매일 힘겨운 싸움을 했다. 우리가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훌훌 털고 잊어버려라.” 

어머니 자신도 그렇게 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감정을 붙들고 씨름했다. 하지만 그런 기질이 아버지가 좋은 남편, 헌신적인 아버지, 의리 있는 동료, 믿음이 깊은 사람이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어쩌면 그 예민함이 아버지를 아버지답게 한, 약자를 응원하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께 묻고 나서 마지막에는 이렇게 썼다. 

“응어리를 없애 버려. 지금 당장!”

Then he signed it, “Love ya.” Just as he’d always say to us.

I imagined him reading this Bible one morning, writing down that prayer. Then getting up and living his life. Cutting out an article to send to me, calling a friend, going to a meeting at church, writing a letter of thanks(he wrote wonderful thank-you notes), reading a report for a charitable organization he supported, buying a birthday present for one of us kids or the grandkids. My heart broke again.

I looked at the yellow slip of paper and thought of a prayer I needed to say myself. One asking forgiveness and understanding. No, Dad wasn’t perfect. Far from it. And there really isn’t any such thing as a functioning alcoholic, no matter what the externals are. Inside they battle their anguish over and over and try to douse that inner fire with drink. Yet I was sure now that his love for us and our love for him were the great joys of his life, his earthly salvation, allowing him to transcend his pain.

Toward the end of his life, the drinking stopped, a medical necessity. I was sorry for him and all of us that he was never able to confront it directly. What he could do, though, was call on God’s mercy. “I’m sorry, Jesus,” I said to myself, “that we were never able to help him more.” At the same time, I knew that a parent never wanted to burden his children, especially our dad. He kept it to the Six O’Clock News.

Then I slipped the prayer back in the Bible and put the book in the box of things we’d take home.

Dad was always honest in his prayers, the ones he shared and now this one tucked in a forgotten Bible. I was grateful for it. And to him. I wanted to reach out and give him a hug. “Thanks for those late-night confessions, Dad,” I’d say. “God is love and loves you just as you are.”

Then I’d add, “I’m proud of you. Love ya.”

그러고는 “사랑한다”라는 말로 마무리하셨다. 우리에게 항상 그랬듯이.

어느 날 아침 이 성경책을 읽으며 이 글을 쓰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그리고 일어나 삶을 살아가시는 모습을. 나에게 보낼 기사를 오리고, 친구에게 전화를 하고, 교회 모임에 참석하고, 감사 편지를 쓰고(아버지는 감사 편지 쓰기의 달인이었다), 후원하는 자선 단체를 위한 보고서를 읽고, 자식이나 손주들의 생일 선물을 사는 모습을. 마음이 아팠다. 

노란색 종이를 바라보며 나 자신에게 필요한 기도에 대해 생각했다. 용서와 이해를 구하는 기도였다. 아니, 아버지는 완벽한 분이 아니었다.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겉모습이 어떻게 보이든지 간에 일상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알코올중독자 같은 것은 없었다. 속으로는 끊임없는 고뇌와 싸우며 술로 내면의 불을 끄려고 애쓰셨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사랑은 당신의 고통을 초월하게 한 삶의 큰 기쁨이자 지상에서의 구원이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면서 아버지는 건강상의 이유로 술을 끊으셨다. 아버지가 음주 문제와 정면으로 맞서지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아버지와 우리 모두에게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대신 아버지가 할 수 있었던 일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었다. 

“예수님, 아버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합니다.” 

혼자 이렇게 되뇌었다. 부모는 자식에게 부담을 주기 싫어한다는 것도 알았다. 우리 아버지는 특히 더 그러셨다. 대신 그것을 ‘6시 뉴스’에서 털어놓았다.

나는 기도문을 성경책에 다시 집어넣고 집으로 가져갈 물건이 든 박스에 넣었다. 

우리와 함께 공유한 기도든 아무도 보지 않는 성경책 속에 있던 기도든 아버지의 기도는 언제나 솔직했다. 그 점에 감사드린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도 감사드린다. 나는 아버지에게 다가가 그를 꼭 안아 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었다. 

“늦은 밤 저에게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 아버지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아버지가 자랑스럽습니다. 사랑합니다.” 

An aching for my own little boy hit me so hard that for a few moments it hurt to breathe.

“People make fun of me for saying this,” the man told me, “but Ronnie is depressed.”

I nodded. I understood.

“He’s the only donkey here now,” he said. “We’re hoping that being around the others at your sanctuary will help him with his grief.”

I got closer to Ronnie so I could look into his eyes. I wanted him to really see me, to see that I knew his pain and that he could trust me to help him.

He didn’t look away. Still, it took quite a bit of coaxing—and lots of carrots—to get him into my trailer. When we arrived at Enchanted Farm Sanctuary, he was eager to get out.

That was the only time he’d been eager to do anything. In the three months since, his depression hadn’t lifted. He’d retreated further into himself, further from life.

Now it was the winter solstice, a time of ending and beginning. Which would it be for Ronnie? It was possible for an animal to die of a broken heart. I didn’t want that for Ronnie, and I would never give up on him, but if he gave up....

I knelt by the pit and lit the bonfire. With a whoosh, it went up. I sat back to watch the flames dance in the night sky. The animals watched with me. I looked at them, all gathered around the fire, and felt a surge of love. This was where the love I had for Danny went—to this sanctuary, to my rescues.

Then I heard a sound behind me. I turned. There was Ronnie, coming out of the barn, walking toward us. He stopped right beside me. The other animals were looking at him, but his gaze was fixed on the fire. We stayed out there for a while longer. I read stories aloud and played wind chimes. A sense of peace settled over us.

The next morning I went to the barn to feed the animals. I couldn’t believe my eyes. Ronnie was eating! He was chomping the hay in his stall. When the other animals went out to roam the sanctuary, he joined them. It was as if his anguish had burned away on the night of the winter solstice and a spark of life had been lit again.

It’s been eight years since Ronnie’s bonfire breakthrough. He’s very active, social and vocal. Stylish too—he likes to wear scarves. He’s the head honcho at Enchanted Farm Sanctuary, out and about every day, checking on the other animals. They all look to him, especially the other two donkeys, Merlin and Morrison. He’s a father figure to them.

As for Ronnie and me? We will always have an unspoken bond. Both of us have known the deepest love and the deepest loss. And we have both found a place for that love to go.

내 어린 아들을 향한 그리움이 세차게 밀려와서 잠시 동안은 숨만 쉬어도 아팠다. 

“내가 이 얘기를 꺼내면 사람들은 비웃죠. 하지만 로니는 우울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해했다. 

“지금 여기서는 로니가 유일한 당나귀예요. 쉼터에서 다른 당나귀들과 함께 있는 게 슬픔에 잠긴 로니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어요.”

남자가 말했다. 

로니에게 가까이 다가가 눈을 들여다보았다. 로니가 진짜로 날 보기를, 내가 그의 고통을 이해했으며 내가 도울 수 있다는 점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녀석은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로니를 트레일러에 태우느라 꽤 많이 구슬려야‒수많은 당근과 더불어‒했다. ‘신비로운 농장 쉼터’에 도착했을 때 녀석은 간절히 나가고 싶어 했다. 

로니에게 무엇이든 하려는 열망이 있었던 건 그때뿐이었다. 그 후 3개월 동안 그의 우울은 덜어지지 않았다. 점점 더 자기만의 세계에 틀어박히고 삶에서 멀어졌다.  

이제 종결과 시작의 때인 동지가 되었다. 로니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동물은 절망에 빠져 죽을 수도 있었다. 로니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고 녀석을 단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로니가 포기해 버린다면….

구덩이 옆에 무릎을 꿇고 모닥불을 피웠다. 휙 소리와 함께 불이 붙었다. 뒤로 기대앉아 밤하늘에서 춤추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동물들도 나와 함께 지켜보았다. 하나도 빠짐없이 불가에 모인 그들을 바라보며 사랑이 솟구치는 걸 느꼈다. 여기가 바로 대니를 위한 내 사랑이 향한 곳이다. 이 쉼터와 내가 구조한 동물들. 

그러다 뒤쪽에서 어떤 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렸다. 로니가 있었다. 외양간에서 나와 우리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바로 내 곁에 멈춰 섰다. 다른 동물들이 로니를 쳐다봤지만, 녀석의 시선은 불에 붙박여 있었다. 우리는 좀 더 오래 자리를 지켰다. 나는 큰 소리로 이야기를 읽어 주었고 풍경(風磬)이 연주를 했다. 평화로운 감정이 우리 위에 내려앉았다. 

다음 날 아침, 동물에게 먹이를 주려고 외양간으로 향했다.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로니가 먹고 있다니! 자기 칸막이 안에서 건초를 우적우적 씹고 있었다. 다른 동물들이 나와서 쉼터를 돌아다니자 로니도 함께했다. 동짓날 밤에 괴로움을 불태우고 삶의 활력이 다시 불붙은 것 같았다. 

로니가 모닥불에서 돌파구를 찾은 지 8년이 지났다. 녀석은 매우 활발하고 사교적이며 목소리 높이는 걸 좋아한다. 세련된 구석도 있어서 스카프 두르기를 좋아한다. 녀석은 ‘신비로운 농장 쉼터’의 우두머리이며 거의 매일 나와서 다른 동물들을 살핀다. 다들 로니를 기다리는데, 특히 당나귀 멀린과 모리슨이 그렇다. 둘에게 로니는 아버지 같은 존재다. 

로니와 내 관계는 어떨까? 우리는 언제까지나 암묵적인 유대감을 나눌 것이다. 우리 모두 가장 깊은 사랑과 상실을 안다. 그리고 둘 다 그 사랑이 향할 곳을 찾았다. 

우편 보내실 곳

[03727]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대문 우체국
사서함 181호


Tel. 02-362-4000

(평일 09:00 ~ 17:00 | 점심 11:30 ~ 12:30)

E-mail. guideposts@fnnews.com


기업은행 082-112675-01-014

(예금주 가이드포스트코리아 주식회사)

우편 보내실 곳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대문

우체국 사서함 181호


Tel. 02-362-4000

(평일 09:00 ~ 17:00 | 점심 11:30 ~ 12:30)

E-mail. guideposts@fnnews.com


기업은행 082-112675-01-014

(예금주 가이드포스트코리아 주식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