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REGIVERS
내가 있어야 할 자리
Guideposts 2022 | 10
CAREGIVERS
Guideposts 2022 | 10
내가 있어야 할 자리
When she lost her child-care job during the pandemic,
she found a new calling caring for seniors
코로나19 팬데믹 동안 아이들을 돌보는 일자리를 잃었지만,
어르신을 보살피며 새로운 소명을 찾았다.
By ALLIE SGRO, North Berwick, Maine
앨리 스그로 메인주 노스 버릭
I arrived at the Edgewood Centre, just over the state line in New Hampshire, at 9 A.M. sharp. It was my first day at the senior care facility as a licensed nursing assistant (or LNA) trainee. I had no idea what to expect. “Good morning, Allie,” the human resources director said. “You’ll be reporting to the south wing.” I tried to act unfazed, but I think I gasped.
The south wing. That was the dementia ward.
I had seen the residents who had Alzheimer’s. Their vacant expressions. Their stiffness. I’d heard they could be unpredictable, aggressive—mean even. I didn’t think I could connect with any of them. And if I couldn’t connect with them, how could I take good care of them?
I forced a smile. “Great,” I said to the HR director.
But I was scared to death. As I walked down the hall to the south wing, all I could think was, I miss my old life.
For 30 years, I had been a child-care professional, and I loved it. Toddlers were my specialty. Their inquisitive nature, their cuddliness, the fact that they are learning something new all the time. The terrible twos? That didn’t scare me. I could get down to their level and deal with any tantrum. I’d never wanted to do anything else.
Then came Covid.
I had been working at the child-care center at Edgewood, where we watched the kids of the staff members. Though I had been there for only a couple of months, I felt right at home. I had just figured out how to rearrange the toddler room to run more smoothly—and then the whole country went into lockdown. Edgewood had to operate with fewer staff, which meant fewer kids for me to look after. By the end of April, the child-care center shut down.
I went on unemployment. I wasn’t sure what I was going to do.
Then one day in mid-May, I was tying up loose ends with Edgewood’s HR director. “You know, the state of New Hampshire has this new program,” she said. “They’ll help you get your LNA degree, and you can start working in our assisted living facility almost immediately.”
That got my interest. I’d brought the toddlers to visit with the residents, and both the kids and the seniors had enjoyed the interaction. I knew there weren’t going to be openings in child care anytime soon. I couldn’t afford not to work; I had a daughter in college and a stepson in high school. Besides, I’m not the type who can sit around at home. I need to be doing something. So I signed up for a free eight-hour class. I learned about feeding long-term-care residents, bathing them, using bedpans, changing linens. I passed a test, and the HR director put me on the schedule for the following Monday. I’d be working as what New Hampshire called a temporary health partner, doing onsite training for my LNA certification, which the facility would pay for.
아침 9시 정각에 뉴햄프셔주 경계 바로 너머에 있는 에지우드 센터에 도착했다. 공인 간호조무사(LNA) 실습생으로 노인 요양 시설에서 보내는 첫날이었다. 무엇을 예상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안녕하세요, 앨리. 당신은 남쪽 별관에서 근무할 거예요.”
인사 담당자가 말했다. 태연하게 행동하려 애썼지만, 숨이 턱 막혔던 것 같다.
남쪽 별관. 그곳은 치매 병동이었다.
알츠하이머병을 앓는 입소자들을 본 적이 있다. 멍한 표정과 경직됨. 그들은 예측할 수 없으며 공격적이고 심지어 심술궂다고 들었다. 그중 누구와도 마음을 터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과 가까이 지낼 수 없다면 어떻게 잘 돌볼 수 있겠는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인사 담당자에게 말했다. “좋아요.”
하지만 죽도록 두려웠다. 남쪽 별관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걷는 동안 생각나는 건 ‘예전의 삶이 그리워’뿐이었다.
30년 동안 나는 아동 양육 베테랑이었으며 그 일을 사랑했다.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들이 내 전문이었다. 아이들의 호기심 넘치는 천성, 껴안아 주고 싶을 정도의 귀여움, 언제나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사실. 미운 두 살이라고? 나는 그런 걸로 겁먹지 않았다.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어떤 투정도 해결할 수 있었다. 그 외에 다른 어떤 일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코로나19가 닥쳤다.
나는 에지우드의 보육센터에서 일했는데, 거기서 직원 자녀들을 돌봤다. 고작 두 달이었지만, 집처럼 편안했다. 좀 더 수월히 운영하기 위해 유아실을 어떻게 재배치할까 막 생각해 냈는데, 그때 마침 전국이 봉쇄에 들어갔다. 에지우드는 더 적은 직원으로 운영되어야 했고, 그건 내가 돌볼 아이들이 더 적어진다는 뜻이었다. 4월 말 즈음, 보육센터는 문을 닫았다.
실업 수당의 도움을 받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실치 않았다.
그러던 5월 중순의 어느 날, 에지우드의 인사 담당자와 남은 일을 마무리하고 있을 때 그가 말했다.
“있잖아요, 뉴햄프셔주가 새로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어요. 주(洲)에서 당신이 LNA 학위를 따도록 도와줄 거예요. 그러면 거의 즉시 우리의 원호 생활 시설에서 근무를 시작할 수 있어요.”
그 말이 내 흥미를 끌었다. 유아들을 데리고 요양원 입소자들을 찾은 적이 있는데, 아이들과 노인들 모두 상호 교류를 즐겼다. 조만간 보육 일자리는 없을 것임을 알았고 나는 일하지 않고 지낼 여유가 없었다. 대학에 다니는 딸과 고등학교에 다니는 의붓아들이 있었다. 게다가 나는 집에 앉아 있는 사람이 못 되었다. 뭔가 해야 했다. 그래서 8시간 무료 수업을 신청했다. 장기 요양 입소자에게 음식을 먹이고 목욕시키는 법, 환자용 변기를 사용하는 법, 침구를 교체하는 법을 배웠다. 시험을 통과하자 인사 담당자는 그다음 월요일 일정에 날 배정했다. 뉴햄프셔주가 ‘임시 보건 의료 파트너’라고 칭하는 일을 하면서 간호조무사 자격증을 위한 현장 실습을 동시에 할 터였는데, 그건 시설에서 지불할 예정이었다.
That first day, I was assigned to shadow Celia, an experienced LNA. She had to feed one of the residents breakfast. The woman stared stonily ahead and refused to open her mouth. Before I knew it, the mashed bananas were tossed around the room. Like with the toddlers. Mealtime had been a mess back then too, but it was a raucous, fun mess.
I didn’t have much experience with dementia. Both of my parents had died in their sixties of cancer. I’d helped out with my mother-in-law, who had COPD. Toward the end, she’d started to forget things, and it was heartbreaking.
The feeding took 30 minutes. As Celia and I were leaving her room, the resident spoke. “Thank you,” she said. “I love you.” A small success.
We moved on to other residents and other tasks. Celia showed me how to read their charts—which outlined their habits, their dietary needs, if they wore hearing aids or glasses, their bathing schedules—and how to operate portable oxygen tanks. I was impressed when Celia effortlessly raised a cantankerous heavyset man with the machine lift. “Don’t worry, you’ll get the hang of it,” Celia told me.
The final task of the day involved helping a woman get settled in her room. I got her a glass of water and found her eyeglasses. She called me a silly pet name. Then she giggled, which got me giggling too. This isn’t so bad, I thought.
Each day I learned a little more. Toward the end of the week, I started to do more on my own. My second time hooking up someone to the toilet lift, the strap fell off suddenly. The 200-pound woman lurched backward. I ran behind her and supported her under her arms. I couldn’t reach the call bell, so I yelled for help. People came running. One of the techs said, “Maybe she shouldn’t be doing this by herself.” The nurse said, “No, Allie’s fine. It wasn’t her fault.” Hearing that boosted my confidence.
By Friday afternoon, I was bone-tired. Being an LNA was a physical job, and my body wasn’t used to it. Before I left, I walked down the hall, peeking into each room to wave goodbye to the residents. Some of them didn’t react. But others brightened a bit, even if they didn’t really recognize me. It struck me how lonely it must feel to be trapped in a mind that was failing. That’s when I heard a voice inside me saying, “This is where you need to be. You can make a difference here.”
There was a lot I had to get used to. Like the studying. It had been almost 30 years since I had taken a class. Talk about intimidating! I sat at my kitchen table to watch the prerecorded lectures on my computer. I’d say to myself, Just do this for an hour. It was a struggle. I learned to ignore everything else—my husband, the laundry, the TV. After an hour, I’d get up, stretch, snack. Then I’d tell myself, One more hour. One hour at a time, I got it done.
첫날, 경험이 풍부한 간호조무사인 실리아를 따라다니며 일을 배우도록 배정되었다. 실리아는 입소자 한 명에게 아침을 먹여야 했다. 그 여자는 무표정하게 앞을 응시하더니 입을 벌리지 않으려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으깬 바나나가 방에 내던져졌다. 아이들과 있을 때처럼 말이다. 그때도 식사 시간은 엉망진창이었지만, 떠들썩하고 웃긴 난장판이었다.
치매 관련 경험은 많지 않았다. 부모님은 두 분 모두 60대에 암으로 돌아가셨다. 만성 폐쇄성 폐 질환을 앓던 시어머니를 도운 적은 있었다. 임종이 가까워지자 시어머니는 깜박깜박하기 시작했는데, 가슴 아픈 일이었다.
음식을 먹이는 데 30분이 걸렸다. 실리아와 내가 방을 나서는데, 입소자가 말했다.
“고마워요. 사랑해요.”
작은 성공이었다. 우리는 다른 입소자들에게 가서 다른 업무를 계속했다. 실리아는 차트-입소자의 습관, 식이 요구 사항, 보청기나 안경 착용 여부, 목욕 일정을 간단히 설명한-읽는 법과 이동형 산소 탱크 작동법을 알려 주었다. 실리아가 기계 리프트를 써서 힘들이지 않고 괴팍하고 건장한 남자를 들어올렸을 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요령이 생길 거예요.” 실리아가 내게 말했다.
그날 마지막 임무는 어떤 여자가 자기 방에 자리를 잡도록 돕는 거였다. 물 한 잔을 가져다주고 안경을 찾아 주었다. 그 사람은 날 장난스러운 애칭으로 부르더니 낄낄거렸다. 그래서 나도 킥킥거렸다. ‘이 일도 그다지 나쁘진 않네’라고 생각했다.
매일 조금씩 더 배웠다. 주말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혼자서 더 많은 것을 하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을 변기용 리프트에 고정하는 일을 두 번째로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끈이 떨어졌다. 91kg에 달하는 여자가 뒤로 흔들렸다. 그 사람 뒤로 달려가서 겨드랑이를 받쳤다. 호출용 벨에 손이 닿지 않았기에 소리쳐서 도움을 청했다. 사람들이 달려왔다. 기사 한 사람이 말했다.
“앨리가 이걸 혼자 하면 안 될 수도 있겠네요.” 간호사가 말했다.
“아뇨. 앨리는 괜찮아요. 앨리의 잘못이 아니었어요.”
그 말을 듣자 자신감이 생겼다.
금요일 오후가 되자 지칠 대로 지쳤다. 간호조무사가 되는 건 몸을 쓰는 일이었고, 내 몸은 거기에 익숙하지 않았다. 퇴근 전에 복도를 따라 걸으면서 각 방을 살짝 들여다보며 입소자들에게 작별 인사로 손을 흔들었다. 몇 사람은 반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날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면서도 조금 밝아졌다. 점점 시들어 가는 정신에 갇혀 있는 건 분명 외로우리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바로 그때 내 안에서 “여기가 네가 있어야 할 곳이니라. 네가 이곳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익숙해져야 할 게 많았다. 공부처럼 말이다. 수업을 들은 지 거의 30년이었다. 얼마나 주눅 들게 하는지! 컴퓨터로 사전에 녹화된 강의를 시청하려고 식탁에 앉았다. ‘이거 한 시간만 하자’라고 혼잣말했다. 고역이었다. 다른 모든 것-남편, 세탁물, 텔레비전-을 모르는 체하는 법을 익혔다. 한 시간 후에 일어나서 스트레칭하고 간식을 먹었다. 그런 다음 혼잣말했다.
‘한 시간 더.’ 한 번에 한 시간씩 해나갔다.
But when I took my LNA board exams, I didn’t pass the clinicals. I was devastated. My husband, Kevin, and my 17-year-old stepson had bought me new scrubs to celebrate. They gave them to me that night anyway.
When I took the test again and passed, my daughter was home from college and the three of them decorated the house. They put sticky notes in the stairwell saying things like “Great job” and “You’ll make the best LNA.”
Kevin has been so supportive of my new career, even though all the studying meant I couldn’t watch the Sunday NASCAR races with him. (Kevin and I are such huge NASCAR fans that we got married trackside at New Hampshire Motor Speedway.) The whole family is proud of me.
I have grown to love so many of the residents. I enjoy being creative, mostly in coming up with gentle ways to say, “No, you can’t do that.” Some workers get upset or frustrated and argue with the residents. I 6take everything in stride, the way I used to with the toddlers. I had one gentleman in the common area who told his daughter over the phone, “I’ve been sitting here at the car dealership for three days, waiting for my car to be fixed!” She replied, frustrated, “No, Dad, your car is here at my house. You are at Edgewood.” Hearing that upset the man, so I went over. “Sorry about the wait,” I told him. “Your car is going to be done in 10 minutes.” He settled down, satisfied.
It’s a matter of putting yourself where the residents are and thinking what they’re thinking. Everyone just wants you to acknowledge what they’re saying, how they’re feeling.
하지만 간호조무사 자격시험을 볼 때 임상 시험을 통과하지 못했다. 큰 충격을 받았다. 남편 케빈과 열일곱 살 의붓아들이 축하해 주려고 새 간호복을 사 왔다. 둘은 어쨌거나 그날 밤 내게 간호복을 주었다.
다시 시험을 치르고 합격했을 땐 딸이 대학에서 집으로 돌아왔고, 셋이 집을 꾸몄다. 그들은 계단통에 “잘했어요”와 “최고의 간호조무사가 될 거예요”라고 쓴 접착성 메모지를 붙였다.
케빈은 내 새로운 일에 지지를 많이 보냈는데, 그 모든 공부 때문에 일요일에 내스카(미국 개조 자동차 경기 연맹-역주) 경주를 함께 볼 수 없었는데도 그랬다. [케빈과 나는 엄청난 내스카 팬이어서 우리는 뉴햄프셔 모터 스피드웨이(뉴햄프셔주 루던에 있는 자동차 경주 트랙-역주]의 경주로 옆에서 결혼식을 올렸을 정도다.)] 온 가족이 날 자랑스러워한다.
입소자 중 많은 이를 점점 더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창의적인 걸 즐기는데 주로 “아뇨. 그건 할 수 없어요”를 부드럽게 말하는 방식을 생각해 낼 때 그렇다. 어떤 직원들은 화가 나서 짜증을 내며 입소자와 말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나는 모든 걸 쉽게 받아넘기는데, 걸음마하는 아이들에게 하던 식이다. 어떤 신사가 공용 구역에서 딸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말했다.
“내 차가 수리되길 기다리면서 사흘 동안 자동차 판매점에 앉아 있어!”
딸은 짜증을 내며 대답했다.
“아녜요, 아빠. 아빠 차는 여기 우리 집에 있어요. 아빠는 에지우드에 계시고요.” 그 말이 남자를 화나게 하는 걸 듣고 내가 다가갔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손님의 차는 10분 내로 될 거예요.”
내가 말하자 그는 만족스러워하면서 진정했다.
With some residents, the connection goes deeper. There’s one gentleman from Boston. He’s a Navy veteran and my dad had been in the Navy, so we clicked. His short-term memory is gone; he can’t remember what I said a minute ago. But, boy, can he tell stories about his Navy adventures! And we’ve compared notes on places we like in Boston, including our favorite Chinese restaurant.
These south wing residents used to have full lives before dementia, and I love hearing about them. Unlike toddlers, who are constantly learning something new, people with dementia are constantly losing something—an ability, a word, a memory, a bit of themselves. I try to move past their symptoms and look for the person within—the Red Sox fan, the news junkie, the Navy man.
I think my personality is suited for this job. I’m easygoing, and I just roll with things. I laugh a lot. And I’ve learned a lot too. How to be more patient, more compassionate—after all, every one of us is on our own journey of aging. It can be a lonely journey without having someone familiar by your side. Most of the residents may not remember my name, but they know who I am. They know that I care about them.
That’s why I decided to work on Christmas Day, 2020. It was the first time I had ever missed Christmas morning with my family. But we were in the middle of the Covid pandemic, and the residents couldn’t have any visitors. I wanted them to see a familiar face. Nobody in my charge seemed to register that it was Christmas, but there was a good meal and I helped the residents open presents. Later I walked down the hall, singing “Silent Night.”
Everyone was settled in their rooms. It was quiet. Then, from one of the rooms, I heard a small voice joining in: “All is calm, all is bright.”
This was where I was meant to be. Gratitude swept over me, gratitude for my new, God-given calling. All was calm and bright, indeed.
입소자의 입장이 되어서 그들이 생각하는 바를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 다들 그저 자기가 말하고 느끼는 것을 우리가 알아 주기를 바랄 뿐이다.
어떤 입소자들과는 교류가 더 깊어졌다. 보스턴에서 온 신사가 있다. 퇴역 해군인데 나의 아버지도 해군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이 잘 맞았다. 그는 단기 기억력이 사라져서 내가 1분 전에 말한 것도 기억할 수 없다. 하지만 오, 그는 해군의 모험담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가장 아끼는 중국 식당처럼 보스턴에서 좋아하는 장소에 관해 정보를 나눴다.
남쪽 별관 입소자들은 치매 전에 온전한 삶을 누렸고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게 좋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는 유아와 달리, 치매 환자는 능력, 단어, 기억, 자신의 일부 같은 것을 계속해서 ‘잃어버린다’. 나는 그들의 증상을 넘어서 그 안에 있는 사람-레드삭스 팬, 뉴스광, 해군-을 보려고 애쓴다.
내 성격이 이 일에 꼭 맞는다고 생각한다. 나는 느긋하고 유연하게 대처한다. 많이 웃고 많이 배우기도 했다. 좀 더 인내하고 연민을 느끼는 법 말이다. 결국 우리 한 명 한 명은 노화라는 각자의 여정 위에 있다. 곁에 친숙한 사람이 없다면 외로운 길이 될 수도 있다. 입소자 대부분은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 안다. 그들은 내가 자신을 돌본다는 걸 안다.
그런 이유로 2020년 크리스마스에 일하기로 했다. 가족과 함께하는 크리스마스 아침을 놓친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 한가운데에 있었고 입소자는 방문객을 전혀 맞을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익숙한 얼굴을 보길 바랐다. 내가 담당하는 그 누구도 그날이 크리스마스라는 걸 새기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훌륭한 식사가 있었고 나는 입소자들이 선물을 뜯는 걸 도왔다. 나중에 나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부르며 복도를 걸어갔다.
다들 자기 방에 편히 있었다. 조용했다. 그때, 어느 방에서 작은 목소리가 함께하는 게 들렸다.
“모든 것이 평온하고 모든 것이 빛나네.”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었다. 감사가 밀려들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새로운 소명을 향한 감사였다. 정말이지 모든 것이 평온하고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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