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매일을 기념합니다
Guideposts 2023 |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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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을 기념합니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을 나의 ‘운명의 상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쉽지 않다. 스치면서라도 얼굴은 보았다거나, 이름만이라도 알아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 운명의 상대가 ‘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책의 얼굴 격인 ‘표지’와 이름 격인 ‘제목’과 ‘저자’를 송두리째 숨긴 책이라면 말이다. 이토록 불친절한 책이 저마다의 ‘인생 책’으로 자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힌트는 다름 아닌 ‘숫자’다. ‘생일’이라는 공통분모로 작가와 독자를 연결해 주는 ‘꿈꾸는별책방’의 이한별 대표를 만났다.
보여 주지 않지만 보이는 책. 드러내지 않지만 드러날 수밖에 없는 책. ‘새로운 책과 인연을 맺는 가장 비밀스런 방식’이라는 모토로 ‘블라인드 데이트 북’(Blind Date With A Book)을 판매하는 특별한 책방이죠.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드러낸 콘셉트인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블라인드 데이트 북’이라는 명칭에 답이 있어요. 책 본연의 몸에 옷을 한 겹 더 입혀 표지를 감춘 채 선보이는 책이죠.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한 가지 콘셉트가 더해졌거든요. 새로 덧입힌 옷에 그 책 저자의 ‘생일’에 해당하는 ‘날짜’를 새겨요. 더불어 책에서 발췌한 ‘문장’과 핵심 ‘키워드’를 제시하고요. 한마디로 ‘생일 책’이라고 표현할 수 있어요. ‘생일’이라는 공통분모로 작가와 독자를 연결하는 거죠. (2022년 11월 기준으로) 약 2100명의 작가 생일과 약 2700종의 생일 책을 보유하고 있어요. 같은 날짜에 여러 작가의 책이 준비되어 있기에 어떤 작가를 만나게 될지 알 수 없죠. 새로 입힌 옷을 벗기기 전에는 표지도 본문도 살펴볼 수 없기 때문에 오직 날짜와 문장 그리고 키워드만으로 독자에게 다가가는 책방입니다.
정말 뜻깊은 방식으로 생일을 기념할 수 있겠네요. 생일을 매개로 작가와 독자를 연결하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착안하게 되었나요?
일본 여행 중에 도쿄에 있는 대형 서점 ‘마루노우치 리딩 스타일’에 간 적이 있어요. 서점 관련 책을 읽다가 발견한 책방이었죠. 그곳의 ‘버스데이 분코’(생일 문고)라는 코너가 제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한국의 잡지나 책에 그 서점이 소개된 것은 2015년인데, 국내에는 동일한 콘셉트로 판매하는 책방이 없더라고요. 이거다 싶었죠. 다만 무작정 덤벼들 수는 없었어요. 장기적인 안목으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비단 생일만이 아니라 특별한 기념일, 각자에게 의미 있는 날짜를 기리기 위해 책을 구입할 수 있도록요. 그때부터 작가들의 생일 데이터와 더불어 문장과 키워드를 차곡차곡 모으기 시작했어요. 그 기간이 1년 정도 걸렸고요.
한 장 한 장 벽돌을 쌓는 심정이었겠어요. 데이터를 모으는 일 외에도 책방 창업을 위해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많았을 텐데요.
책방 이름을 지어 로고를 만들고, 책방을 꾸릴 공간을 마련해 내부를 꾸미는 등 외적인 요소들의 기반을 닦아야 했어요. 책방 이름은 개인적으로 운영하던 블로그 이름 ‘꿈꾸는 별’을 따서 지었죠. 로고는 2018년에 공모전 사이트를 통해 응모작을 받아 선정했고요. 책방을 꾸릴 공간을 찾는 데는 6개월 정도 걸렸어요.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적합한 자리를 찾게 되었죠. 그 공간을 찾은 날이 다름 아닌 제 생일이었거든요. 2018년 9월, 여름 끝 무렵에 배가 고파 평소 즐겨 찾던 토스트 가게에 갔는데 그 가게가 헐려 있더라고요. 코너에 위치해서 다른 사람들이 탐내는 곳이었고, 권리금도 꽤 높아 저는 염두에 두지 않던 자리였죠. 급한 사정이 있어 문을 닫았다는 사정을 들은 뒤 지체하지 않고 계약을 했어요. 제 생각을 뛰어넘어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느꼈거든요.
과연 ‘생일 책’을 판매하는 책방답게 생일에 책방 공간을 선물받으셨네요.
우연이라기에는 절묘했죠. 그야말로 ‘서프라이즈’한 일이었어요. 책방 창업을 준비하는 과정은 물론이고 책방 오픈 초기에 지속적으로 되새기며 묵상한 말씀을 떠올리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 ‘선물’을 받았어요. 신명기 6장 10-13절 말씀이에요.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과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고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과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배불리 먹게 하실 때 여호와 하나님을 잊지 말고 경외하고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하라는 말씀이에요. 솔직히 처음에는 그 말씀이 생각날 때마다 짐짓 밀어내기도 했어요. 제 욕심이 투영된 건가 싶어서요. 그런데 매번 말씀이 제 안으로 돌아오더라고요. 책방의 첫 공간을 마련할 때도, 외부에서 운영하는 홍대의 ‘경의선 책거리’와 노들섬의 ‘노들서가’ 그리고 인사1길의 ‘KOTE’에 입점할 때도, 백화점과 협업해 팝업 스토어를 열게 될 때도 그 말씀 앞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려 했어요. 과분할 만큼 적합하고 아름다운 자리를 마련해 주신 그분의 손길에 ‘거룩한 부담감’을 느끼면서요.
그분의 손길에 의지하는 신앙인으로서 어떤 비전을 품고 책방을 운영하시나요?
지역 사회의 소외된 이웃과 함께하는 책방으로 자리하고자 여러 가지를 구상하고 있어요. 저희 책방은 일반적인 책방과 달리 기존의 책에 옷을 한 겹 더 입히는 포장 과정이 있잖아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정성이 요구되고, 단순 반복 노동이라서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이에요. 하지만 누군가와 교제하며 ‘함께’하면 즐거운 일이 되죠. 이 일을 근처 장애인복지관의 발달 장애인 친구들과 함께하기 위해 구상 중이에요. 이를 위해 적절한 때에 사회적 기업으로 전환하려는 생각도 하고 있어요. 한편으로는 보육원 친구들과도 함께하고 싶어요. 퇴소 이후 갈 길을 몰라 막막한 상황에 처한 청년들이 새로운 소망을 품을 수 있도록요. 그들 중에는 본인의 생일을 모르는 경우가 있거든요. 이 일을 함께함으로써 태어난 날을 기리는 ‘생일’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들 자신을 존귀하게 받아들이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요.
책방 이름의 ‘꿈꾸는 별’이 암시하듯 과연 꿈과 아이디어가 풍부하시네요.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출판사 마케터로 사회에 진입하셨는데, 당시 꿈 목록 중 ‘책방 창업’도 있었나요?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책과 밀접하게 닿을 수 있는 출판사에 입사하긴 했지만, 처음부터 책방 창업을 꿈꾸지는 않았어요. 본격적으로 책방 창업이 꿈 목록에 자리하게 된 것은 재직하던 출판사의 직영 서점에서 쌓은 실무 경험 덕분이었죠. 신입 사원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회가 주어져서 다양한 시도를 해 볼 수 있었어요. 시야가 열렸다고 할까요. 책이 어떻게 만들어져서 어떤 통로로 독자에게 흘러가는지, 그 과정에서 각자가 감당하는 역할은 무엇인지 등. 한 가지 일만 하면 못 보았을 것들을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두루, 넓게 경험하게 되었죠. 그때부터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의 시선으로 책을 바라보고 분석하는 훈련을 했어요. ‘사람들은 왜 책을 안 읽을까?’ ‘책으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느 단계까지 가야 할까?’ 이런 질문들이 제 안에 떠돌았죠.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직접 부딪쳐 실험하고 증명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그래서 과감히 창업을 결심했고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맨몸으로 부딪치셨네요.
망해도 다시 일어설 힘이 있을 때 시작하자는 마음이 컸어요. 좀 더 나이가 들면 영영 시도하지 못할 것 같았거든요. 사실 생일 데이터를 천천히 모은 뒤 열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마냥 시기를 늦출 수만은 없었어요. 그렇다고 충동적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에요.(웃음) 조급함과 신중함 사이에서 출발했다고 해야 할까요.
고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요. 어떤 식으로 극복해 나가셨나요?
불쑥 낭떠러지를 만난 것만 같은 시기가 있었어요.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정부의 거리 두기 규제가 강화되어 당장 내일이 염려되는 날들이 많았죠. 품고 있던 질문들을 실험해 보려고 시작한 책방인데, 실험 결과를 증명할 길이 막히니 힘들더라고요. 덕분에 신앙은 더 단단해졌어요. 특히 재정 영역을 하나님께 많이 맡기게 되었죠. 날마다 묵상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평안을 느꼈어요. 이전에는 꿈이 좌절되었을 때 내 힘과 의지로 극복하려 몸부림을 쳤다면, 이제는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새로운 꿈을 품으려 노력해요. 내 생각을 고집하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방향으로 나아가니 고민이 사그라들더라고요. 지금은 매일 한 권 한 권 포장을 해야만, 그야말로 하루하루 ‘손’으로 ‘수고’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구조가 된 것에 대해서 오히려 감사한 마음이에요. 수고한 만큼 정직한 결과로 돌아오는 이 일이 뜻깊고 소중하거든요. 일례로 작년 가을 팝업 스토어 제안을 받았을 때, 인간적인 계산으로는 매출이 잘 나오는 곳이 아니라 갈등이 되었지만 전도서 9장 10절 말씀을 묵상하며 기쁨으로 수락했어요. “네 손이 일을 얻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스올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시시로 마음이 느슨해질 때면 이 말씀을 떠올리며 자세를 다잡곤 해요.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도 꿈꾸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외부 활동도 왕성히 하셨죠. 책방 안팎에서 경험하고 시도한 활동들을 소개해 주시겠어요?
하나의 일이 또 다른 일로 연결되는 방식으로 지경이 넓어졌어요. 창업 후 한 달이 지났을 무렵 경기콘텐츠진흥원에서 운영하는 ‘경기서점학교’에서 강연 의뢰가 왔어요. 그 자리에서 15분 동안 책방의 콘셉트와 철학을 소개했죠. 이를 계기로 ‘한국서점조합연합회’에서 운영하는 또 다른 서점학교에서도 섭외가 들어와 양쪽 학교에서 매년 강연을 하고 있어요. 한편으로는 경기도에서 여러 기회를 주신 덕분에 ‘청년 활동가’로서 지역 강연자로 서게 되는 일이 많아졌어요. 2019년에는 경기콘텐츠진흥원에서 주관하는 ‘경기 히든 작가’ 공모전을 직접 맡아 진행하기도 했어요. 이후 ‘꿈꾸는별’로 출판 등록을 해서 수상작 세 종을 출간하기도 했고요.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체득한 경험이었죠. 무엇보다 저는 한곳에 붙박여 독자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독자를 찾아가려고 해요. 그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2019년에 이어 2022년에도 국제도서전에 참가했는데, 준비해 간 책이 불과 사흘 만에 모두 판매되어 일찌감치 부스를 접고 남은 기간 동안 도서전을 여유롭게 둘러보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어요. 올해에는 ‘책방’이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넘어 독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북트럭’으로 전국 축제를 돌아다니는 일도 구상하고 있어요.
독자를 찾아가려는 노력, ‘꿈꾸는별책방’이 사랑받는 비결 중 하나가 아닐까 싶네요. 처음 ‘블라인드 데이트 북’을 접한 독자들의 반응은 어떤가요?
경이로워하기도 하고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여러 질문을 던지기도 해요. 비슷한 질문을 자주 받기 때문에 매번 같은 설명을 해야 하는 입장이지만, 그 반복적인 일이 저는 정말 즐겁더라고요. 반신반의하며 사 간 분들이 나중에 친구들을 데려와 소개하거나, 지인의 생일 선물로 여러 권을 구입해 갈 때 가장 큰 보람을 느껴요. 정말 고심해서 큐레이션한 마음과 정성을 알아봐 주는 것 같거든요. 그것이 책방을 지속할 수 있는 원동력이기도 해요.
‘꿈꾸는별책방’만의 큐레이션 기준이 있다면요?
소설이나 에세이 위주로 큐레이션을 하기는 하지만 특정 분야에 한정 짓지 않으려 해요. 좋은 책들이 빠르게 잊히는 게 늘 안타깝거든요. 그래서 베스트셀러나 유명 작가의 책보다는 두루 알려지지 않았어도 내실 있는 책을 고르려 하죠. 숨어 있는 좋은 책을 찾기 위해 매일 온라인 서점 사이트를 샅샅이 살펴봐요. 때로는 한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룬 매니악한 책을 일부러 선정하기도 하고요. 평소라면 찾아 읽지 않을 법한 낯설고 생소한 세계를 ‘생일’이라는 명목으로 주선하는 만큼 각 사람에게 뜻깊은 책으로 남으리라 믿으면서요.
그 믿음이 독자들에게도 닿을 것 같습니다. 책방을 운영하는 경영자이자 실무를 감당하는 유일한 근로자로 일하면서 궁극적으로 품게 된 소망이 있을까요?
2021년에 아이슬란드로 여행을 갔는데, 그곳 사람들을 보며 ‘이웃’에 대해 생각하게 됐어요.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 그들의 저력은 이웃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 같더라고요. 우리나라의 출판 추세를 보면 책 쓰는 이는 급격히 늘어나는데 정작 읽는 이는 줄어 가는 기형적인 구조잖아요. 이웃을 향한 통로가 ‘책’이라는 관점으로 보면 독자의 감소는 안타까운 현상이 아닐 수 없죠. 그런 의미에서 저는 ‘꿈꾸는별책방’이 이웃을 향한 소통의 창구로서 기능하길 소망해요. 1쇄를 끝으로 절판 위기에 처한 ‘좋은 책’들의 수명을 연장할 수 있도록요. 그러기 위해 꾸준히, 오래 살아남는 책방이 되기를 바라고요. 지금은 1억, 10억, 그보다 더 큰돈이 생기더라도 변함없이 책방을 하고 싶다고 소망할 만큼 책방이 제 ‘평생의 업’으로 공고히 자리하게 됐어요.
새해를 맞아 저마다의 ‘버킷리스트’를 작성할 독자분들께 응원의 말씀 부탁드립니다.
인생이 하나의 책장과 같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 책장에 한 권쯤은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책’을 꽂아 두고 싶지 않나요? 타인의 시선, 사회적 소명 등 누군가의 무엇이 되기 위한 꿈도 좋지만,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나만의 꿈’을 가지시기 바라요. ‘인생 책장’의 주인은 당신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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