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가려진 길의 가이드러너


Guideposts 2023 |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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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려진 길의 가이드러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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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까지 쉬고 내일부터 하자.” 오늘도 ‘작심삼일’인 대다수 사람들이 하는 생각이다. 그런데 선지원(31) 러너는 달리 생각했다. “일단 오늘 해 보고 내일부터 하지 말자.” 

시각장애 러너인 그를 만난 날은 날씨가 제법 쌀쌀했다. 이렇게 추울 때도 뛰느냐고 묻자 그는 “오히려 추울 때 땀이 안 나 달리기 좋다”며 웃었다. “오늘은 오전 6시부터 한강을 달렸어요. 회사가 유연 근무제를 실시하고 있어서 달리고 출근했죠.” 

그는 한국컴패션 후원자성장팀에서 일한다. 미국의 애버렛 스완슨 목사가 1952년 한국의 전쟁고아를 돕기 위해 만든 이 기관은 전 세계 27개국의 가난한 어린이들을 결연해 성인이 될 때까지 양육하는 국제어린이양육기구로 자리 잡았다. 선지원 러너는 한국컴패션의 직원이자 동시에 후원자다. 

“마라톤은 늘 힘들어요. 제가 웃으면서 달리니까 늘 좋기만 한 줄 알지만,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은 몇 분에 불과해요. 건강을 위해 조금만 참자, 그런 마음으로 여기까지 왔어요.” 







일주일에 며칠이나 달리나요?


겨울이라서 로드로 직접 나가는 것은 일주일에 4회, 러닝머신 합하면 매일 달려요. 오는 3월 풀코스를 준비 중이거든요. 처음에는 재미로 했다면 지금은 선수 활동도 겸하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훈련합니다. 2017년부터 달렸는데 선수 활동이 꾸준히 달리는 데 도움이 됐어요. 선수니까 기량이 늘어야 하잖아요. 그래야 제가 달리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얻었다는 사람들에게 계속 용기를 줄 수 있으니까요.

 


기량이 얼마나 늘었나요?


처음 10km 출전 당시 75분 걸렸는데 지금은 50분으로 단축됐어요. 현재 충청남도 소속인데 2021년 우연한 기회로 대회에 출전했다가 성적이 좋게 나오면서 선수로 활동하게 됐어요. 지난해 소속팀의 기대에 부응하고 싶어 열심히 하다가 되레 많이 다쳤어요. 그래도 제42회 전국장애인체육대회에서 3위로 메달권엔 들 수 있었어요. 평소보다 순위가 떨어지긴 했지만요. 가이드러너가 회사에 연차 쓰고 울산까지 내려왔는데, 메달 없이 돌려보내면 미안할 것 같아서 열심히 뛰었습니다. 



선천적 시각장애라 천국에 가서나 뛸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요. 달리기를 결심하기까지 두려움이 컸을 텐데요. 어떻게 극복했나요?


두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너무 막연하니까 이게 가능할까 그런 마음이 더 컸던 것 같아요. 다치지 않을까 두려우면서도 설렘을 안고 뛰었던 기억이 나네요. 달린 첫 순간의 느낌은 하도 오래돼 흐릿한데 일단 놀라웠어요.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일을 하고 있으니까 아주 신기했죠. 달리기를 결심하기까지 시간은 별로 안 걸렸어요. 건강이 악화돼 뭐라도 해야 했거든요. 



사회 초년 시절 폐결핵에 걸렸다고요. 달리기 전에는 어떤 운동을 했나요?


거의 안 했죠. 숨쉬기 운동만 했어요.(웃음) 몸이 아프면서 살기 위해 운동을 했어요. 헬스장이나 필라테스 센터에 가면 장애인이라 받아 줄 수 없다고 거절당했어요.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운동이 무엇일까? 한창 고민하던 중에 친구의 소개로 달리기를 만났죠.  



가족도 아닌 타인끼리 ‘트러스트 스트링’을 잡고 달리는 경험이 그 자체로 특별한 것 같아요. 서로가 서로를 믿어야 하잖아요.


솔직히 처음부터 서로를 다 믿는 건 아니에요. 사람이 자기 자신도 잘 못 믿는데, 타인을 온전히 믿기란 쉽지 않죠. 믿어 주는 것부터 시작해요. 내가 달리려면 이 사람(가이드러너)을 믿어 줘야겠다, 그렇게 여러 경험을 함께하면서 서로 놀라고,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면서 믿음을 세워 가요.

장지은 가이드러너와는 마치 인생의 단짝처럼 보였어요.


단짝입니다. 우리나라에 딱 하나 있는 한국시각장애인마라톤에서 만났는데, 한번 같이 달렸더니 말이 잘 통했죠. 아무래도 장거리를 뛰다 보니까 얘기를 많이 나누게 되거든요. 죽이 잘 맞아서 따로 만나 자주 뛰고, 대회 신청해서 출전하고, 또 매해 1월 1일이면 새해마라톤대회에 나가면서 추억을 쌓고 신뢰도 쌓았습니다.



‘트러스트 스트링’을 통해 서로 신뢰를 쌓는 과정이 마치 믿음을 세우는 과정과 닮았네요.


맞아요. 하나님을 믿는 과정과 정말 유사해요. 하나님이 일상에서 믿음을 시험하실 때가 있는데, 그때 잘 믿기지 않아도 그냥 믿어 드리잖아요. 그렇게 믿으면서 한 걸음씩 나아가고, 또 하나님께 갖는 다양한 감정의 시간을 거치면서 믿음이 세워지듯, 시각장애인 러너와 가이드러너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장애가 없어도 직장인으로 독립하기까지 수많은 어려움과 좌절을 겪잖아요. 선지원 러너님은 더 만만찮았을 것 같습니다. 


부모님과 물리적 독립은 고등학교 때 이뤄졌어요. 학교가 멀어서 장애인 거주 시설에서 지냈고 이후 대학 기숙사에서 생활했어요. 대학 다닐 때는 다음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정말 힘겨웠어요. 생활비가 모자라니까 아르바이트도 열심히 했죠. 주로 점자책 오타 찾기나 결혼식이나 장례식장에서 피아노 반주를 했어요. 



피아노는 언제 배웠나요? 한국컴패션 15주년 기념예배 ‘더 워십’(2018)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영광스러운 기회였죠. 어릴 적 장난감 피아노를 치다 고등학교에서 본격적으로 배웠는데 재능 있다는 말을 듣고 사실 음대 진학을 꿈꿨어요. 하지만 집안 사정상 포기했죠. 당시에는 하나님이 왜 길을 열어 주시지 않을까, 불만스러웠어요. 돌이켜 보면 전공할 만큼 잘한 것 같진 않아요. 또 하나님이 피아노는 제게 생계용으로 주신 것 같아요. 뽐내려고 준 게 아니고. 덕분에 피아노를 치거나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었거든요.



아무리 불우한 환경이라도 자신을 사랑해 주는 딱 한 사람만 있으면 충분히 잘 자랄 수 있다는 사회학자 에미 워너의 연구 결과가 있는데요. ‘트러스트 스트링’이 마치 그 한 사람을 상징하는 것 같아요. 선지원 러너님도 세계 어린이의 가이드러너인데요, SBS-TV 〈힐링캠프〉 배우 차인표 편(2012)을 보고 아이들을 후원하게 됐다고요?


네. ‘사랑은 나누는 것’이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어요. 전 사랑은 받거나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늘 많은 분들께 사랑을 받았지만, 그게 감사하면서도 부담을 느꼈어요. 그래서 더 열심히 살았지만 나 역시 주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하지만 줄 게 없었고, 또 준다는 것이 내 것을 남에게 이관하는 것으로 느껴졌어요. 그런데 나눈다는 것은 내게도 있고 남에게도 있는 거잖아요. 모든 시각장애인은 공감하겠지만, 우리는 필요한 물건이 바닥나면 새로 못 구한다는 불안감이 있어요. 그래서 늘 아끼고 가능하면 쌓아 둬야 마음이 편해요. 아직도 그런 습성이 남아 있죠.


비장애인보다 더 미래가 불안한데도 첫 월급을 타자마자 인도 어린이를 후원했다고요?


원래는 월급 타면 저축하고 물건도 쟁여 놓을 계획이었어요.(웃음) 그런데 차인표 배우의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내 걸 나눈다고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거죠. 그동안 제게 도움을 줬던 사람들 역시 자신의 것을 온전히 희생하면서 나눠 준 게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의 부담도 덜었어요. 그렇게 2014년 취업하고 바로 결연을 맺어 후원을 시작했어요. 인턴 월급이 세금 떼면 69만 원 정도 됐는데, 제겐 정말 큰돈이라 혼자 다 가지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힘들게 사회생활 하면서 번 돈으로 누군가를 돕는다고 생각하니까 삶의 동력이 되더라고요.



2019년 멕시코컴패션 비전트립을 통해 후원한 아이들을 직접 만났을 때 어땠나요?


당시 알론드라와 호세를 만났는데, 정말 강렬한 경험이었어요. 다른 후원자들은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사진을 통해 확인하지만 제게 사진은 그저 종이일 뿐이잖아요. 대신 ‘컴패션 메이트’가 번역해 준 아이들 편지 등을 통해 그들의 성장을 느꼈죠. 그러다 직접 만나러 가게 됐는데 우려도 있었어요. 솔직히 한국에선 사람들이 제게 잘 다가오지 않아요. 장애인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몰라서요. 그런데 이 친구들은 나를 언제 봤다고 보자마자 막 안기고 매달려서 정말 기뻤어요. 내가 이 아이들 삶에 한 부분이구나, 아이들이 내 생각보다 나를 더 많이 사랑해 주는구나, 그때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이 양육을 계속해야겠다고 마음먹었어요.



선지원 러너님 인생의 가이드러너는 누구인가요?


나와 함께 달리는 가이드러너 중에선 단짝 장지은 씨와 단거리 경주를 함께하는 김진균 씨를 꼽을 수 있겠네요. 달리기를 매개로 만났지만 제 삶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들이에요. 저는 평생 달리면서 저도 건강하고 남들에게도 용기를 주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데, 그들이 없으면 안 되니까요. 이들과 함께하면서 제가 그저 도움만 받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걸어가는 파트너라는 걸 알았어요. 또 제가 후원하는 친구들도 제 가이드러너예요. 저도 사람이니까, 가끔 힘들면 멈추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있잖아요. 그럴 때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게 이 친구들이에요. 이 친구들이 학교 졸업할 때 직접 가서 보고 싶은데, 여기서 내가 멈추면 안 된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가장 큰 존재들이에요. 제가 그들의 가이드러너이지만 동시에 아이들 역시 저의 가이드러너입니다. 또 친구들과 회사 동료들도 빼놓을 수 없죠.

마라톤 전후로 삶의 변화를 꼽는다면요?


정말 많아요. 가장 큰 변화는 제 몸을 사랑하게 됐어요. 마라톤하기 전엔 생활비가 부족하니까 음식도 무조건 질보다 양이었어요. 라면 등 싼 음식만 먹고, 겨울에는 난방도 하지 않고 그저 살아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마라톤 이후 제가 건강할 이유가 생겼어요. 제 모습을 보고 용기와 위로를 받는다는 사람들을 위해 계속 달리고 싶어졌죠. 그러려면 제가 건강해야 하잖아요. 하나님이 제게 허락한 유한한 신체를 잘 지키고 가꿔야겠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 기회를 주실 때 아파서 못하겠어요, 하지 않아야겠다 해요.



요즘 기도 제목은 무엇인가요?


꼭 하는 기도가 있다면, 죽는 날까지 믿음으로 사는 거예요. 제 꿈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말씀이 고린도후서 4장 7절이에요.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질그릇이 마치 저인 것 같아요. 뛰어난 사람만 살아남는 세상에서 저는 하자가 많은 사람이잖아요. 그래서 어릴 적부터 이 하자를 없애는 데 집중했어요. 그런데 그릇에 흠집도 많고 구멍도 많아야 이 보배가 더 빛날 것이라고 하시니, 제게 수많은 결점이 있는 것은 예수님 입장에선 좋은 도구이고 통로라는 생각이 들어요.



올해 목표나 바람이 있다면요? 그리고 가이드포스트 독자들께 한마디 부탁합니다.


(약간 망설이다) 인생의 목표가 생겼어요. 제가 스포츠를 통해 세상 밖으로 나왔잖아요. 달리기 전후로 삶이 달라졌고요. 이 세상엔 아직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한 장애인이 많아요. 행정상의 장애인뿐 아니라 마음의 질병이나 세상에서 입은 상처로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을 세상 밖으로 꺼내 주고 싶은 소망이 있어요. 제겐 스포츠가 아주 강렬한 매개체가 됐기 때문에 스포츠를 통해 사람들을 돕고 싶어요. 그래서 일단 좀 더 멋진 스포츠인이 되는 게 목표예요. 풀코스에 도전하는 것도 이 때문이고요. 또 제가 어린이 결연을 통해 행복하게 잘 지내기 때문에 어린이 후원도 많이 해 주면 좋겠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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