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그 '한 사람'이 되기를
Guideposts 2024 |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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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사람’이 되기를
막연한 끌림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고요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세상으로의 진입, 그 한 시절의 선택이 두고두고 그를 이끌었다. 신묘하게도 인생의 기로마다 선택한 또 다른 길은 결국 그 시절의 길목과 닿아 있었다. 의료 선교사를 꿈꾸던 의대생에서 외과 전문의가 되기까지, 정규성 교수의 여정에는 그 어느 때보다 순수하고 진실했던 시절의 선택, 그 속에서 일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했다. 이제 그는 ‘수어(手語) 하는 외과의’로서 소리로 가득 찬 세상을 향해 간절한 손짓을 한다. ‘소리 없는 소리’로 부르짖는 농인(聾人)들의 표정과 몸짓에 주목하기를, 그리하여 그들과 더불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기를 소원하며.
20년 전의 ‘선택’이 오늘의 ‘소명’이 되었습니다. ‘수어 하는 외과의’라는 수식어의 시작점에는 대학 시절 선택한 수어 동아리가 자리하고 있는데요. 본인에게 ‘수어’란 무엇인지 정의해 주시겠어요?
수어는 저의 대학 시절을 풍성하게 채워 준 소중한 ‘벗’들의 언어예요. 그런 의미에서 저에게 수어는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들이 쓰는 언어’ 그리고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언어’죠. 수어의 매력은 상대방에게 온전히 집중해야 한다는 점에 있어요. 상대방의 표정과 몸짓에 ‘눈을 기울여야만’ 하는 대화 방식이 저는 참 좋아요. 게다가 수어는 아름다워요. 장면이 눈앞에 그려지듯 생동감 있게 다가오거든요. 수어를 유려하게 구사하는 농인은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를 정확히 구현할 뿐만 아니라, 공간을 활용해 여러 사람이 이야기하는 장면을 완벽하게 표현해 내죠. 그런 수어를 보고 있으면 감탄이 절로 나와요.
오늘에 이르기까지 의사로서 수많은 선택지가 주어졌을 텐데요. 매번 선택의 중심으로 삼은 가치는 무엇인가요?
20대 때는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길, 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택이 무엇인지를 찾으려 애썼어요. 진로, 배우자 등 인생을 좌우하는 문제 앞에서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정답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 거죠. 그러다 30대가 되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었어요. 하나님은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어. 너는 대답만 하면 돼’를 줄여 부르는 신조어-편집자 주)’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가 축구를 참 좋아하는데요. 20대 때의 저는 ‘아빠’와 ‘축구’ 둘 중에 무조건 ‘아빠’를 선택해야 하는 어린아이처럼 행동했어요. 즉 축구를 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의무적으로 아빠와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처럼 여긴 거죠. 축구를 버리고 아빠를 선택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빠와 함께 축구를 하면 되는 일인데 말이에요. 하나님은 내 삶의 우선순위를 나와 함께 정하시고, 그 모든 일을 나와 함께하고 싶어 하는 분이잖아요. 하나님은 다른 것을 포기하고 선택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나와 ‘동행’하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죠. 그 후로 새로운 선택지를 마주할 때마다 내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를 먼저 점검하게 되었어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좋은 상태라면 선택지 가운데 내 마음이 평안한 쪽으로 결정하죠.
한때 의료 선교사를 꿈꾸며 세계 최대의 민간 병원선 ‘머시쉽(Mercy ships)’을 타고 선교 활동을 하시기도 했죠. 그 시절 ‘아빠 하나님’과 동행하며 얻은 가장 소중한 경험을 나눠 주세요.
머시쉽은 의료 사각지대의 항구에 정박해 무상 진료와 수술을 하는 한편, 의료 교육과 지역 환경 개선 등의 활동을 하는 국제 보건 의료 NGO예요. 저는 일주일의 반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고, 나머지 반은 환자를 선별하는 일을 하거나 현지 병원 및 농인 학교에서 활동했어요. 40개국에서 온 400~500명의 다양한 봉사자들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저마다의 재능으로 협력하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죠. 대학 시절 농인과의 만남을 통해 ‘장애인을 위한 의사’를 꿈꾸게 되었다면, 머시쉽에서의 경험을 통해서는 ‘혼자 꾸는 꿈은 그저 꿈으로 그칠 수 있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는 것을 배웠죠. 또한 이 사회를 더 나은 곳으로 변화시킬 대의(大醫)가 되려면, 단순히 환자를 잘 보는 것을 넘어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과 소통하고 협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꿈이 현실화되는 현장에서 값진 경험을 하셨네요. 얼마나 활동하셨나요?
아프리카에서 3개월간 머물렀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머시쉽 한국 지부에서 3개월간 인턴을 했어요. 당시 한국 지부 인력이 많이 부족해서 머시쉽 홍보부터 후원 관리에 이르기까지 여러 일을 해야 했어요. 그 분야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대학 동문들의 도움을 받으며 CMS 후원 시스템과 새로운 홈페이지를 만들었죠. 혼자였다면 할 수 없던 일을 다른 이들과 함께 해결해 나가면서 팀워크의 소중함을 다시금 절감했어요. 시간이 많이 흐른 뒤 한국 머시쉽은 사단법인이 되었고, 저는 작년부터 이사로서 운영진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의사 수련 과정 중에 ‘외과’를 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외과에 대한 흥미나 원대한 포부가 있어서는 아니었어요. 다만 외과가 선한 일을 하는 데 비교적 쓰임이 많겠다고 생각했죠. 맥가이버 칼처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는 과라고 생각했거든요.(웃음) 사실 3D(Dirty, Dangerous, Difficult)로 여겨지는 외과 수련을 흥미도 없는 채로 감당하려니 정말 힘들었어요.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한동안은 사직서를 써서 가운 주머니에 넣고 다닐 정도였죠.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그나마 관심을 두었던 소아외과를 못 하게 되면서 외과를 선택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어요. 수술보다는 중환자를 보는 것이 더 적성에 맞는 것 같아 중환자 외상외과 펠로우를 시작했지만, 그마저도 3개월 만에 중단했어요. 당시에는 무엇을 위해, 왜 그 자리를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스스로 답을 찾지 못했거든요. 이전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던 여러 선택지 앞에서 표류하고 있을 때, 감사하게도 망망대해를 비춰 주는 등대 같은 사람들과 다양한 기회들을 만났어요. 여러 통로로 장애인 분야에서 활동하는 분들과 연결되었고, 그 무렵 농인 교회를 다시 다니게 되었죠. 그러한 시간 가운데 제 안에 단 하나의 키워드가 선명히 남았어요. ‘장애인의 필요를 채우는 외과의사’라는 키워드요.
그 키워드를 붙들고 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으로 적을 옮기셨어요. 당시 장애인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고민한 지점들을 이야기해 주세요.
첫째, 장애인들은 장 천공 시에 수술할 여건이 안 된다는 이유 등으로 건강검진에서부터 소외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장애인 의료 분야에 뜻을 둔 나부터 뛰어들자는 생각에 우선 내시경을 배우기로 했죠. 둘째, 장애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배변 문제에 도움을 주려면 간단한 시술부터 각종 응급 수술, 대장암 수술까지 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셋째, 다양한 장애인 의료 문제를 해결할 역량과 마인드를 갖춘 ‘장애친화종합병원’의 필요를 절감했어요. 그러려면 자원을 확보하고 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고요. 이 세 가지 목표를 구체적으로 세운 뒤 병원을 찾아보니 가톨릭대학교 성빈센트병원이 가장 적합해 보였어요. 이곳에서 보낸 1년 반 동안 저는 농인을 비롯해 여러 중증 장애인들을 치료하며 경험과 역량을 쌓을 수 있었어요.
새로운 선택지를 마주할 무렵 다시 농인 교회를 다니게 되셨다고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
수어 동아리 활동을 하던 대학 시절 농인 교회에 출석하다가 졸업 후 일반 교회로 옮겼어요.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한 뒤 학업으로 인해 바쁘기도 했지만, 소아외과, 의료 선교, 국제 보건과 같은 새로운 키워드들이 제 안에 자리를 잡으면서 자연스레 농인과 수어로부터 멀어졌죠. 하지만 인턴, 레지던트 수련 기간 중 만난 몇몇 농인 환자들로 인해 다시금 농인이 제 삶의 화두로 자리 잡게 되었어요. 의료의 사각지대에 있는 농인들의 어려움을 아는 의사는 몇 명이나 될까? 이들을 위해 뛰어들 ‘누군가’는 과연 누구일까? 그런 질문들이 솟구치더군요. 농인 의료 문제를 풀어 가려면 다시 수어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유튜브에서 영상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그중 청함교회 목사님의 수어 설교 영상을 보며 공부를 하다가 교회 출석까지 하게 되었죠. ‘청함교회’는 청각장애인과 함께하는 교회 또는 청각장애인과 청인이 함께하는 교회라는 모토로 세워진 교회예요. 서로 다른 문화를 지닌 청각장애인과 청인이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서 하나 되어 교제하고 섬기는 공동체죠. 청함교회에 가니 마치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와 있는 듯 편안하고 좋더라고요.(웃음)
농인 환자들로 인해 실감한 의료 사각지대의 사연을 들려주세요.
인턴 때 중환자실에서 만난 농인 환자가 있었어요. 여자 분인데 뇌경색 후 섬망 증상으로 오해를 받아 결박 조치를 당한 상태였죠. 제가 수어로 농인인 것을 확인하고 팔을 풀어 주자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는 수어를 하더군요. 내일이면 물을 먹을 수 있다는 제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하고 잠드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울컥했어요. 고통을 표현할 방법이 몸짓과 신음뿐인 농인의 애환이 고스란히 전해졌죠. 또 다른 분은 40년간 투석을 받아 온 농인 할아버지였어요. 고령에 혈관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신장 이식이 가능하다는 소식을 듣고 어렵게 수술을 결심한 분이었죠. 수어를 할 줄 아는 의사가 주치의라는 사실만으로 무척 든든해 하는 환자와 보호자를 보니 ‘이 한 사람을 위해 내가 수어를 배웠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뿌듯하고 기쁘더라고요. 저는 그 환자분의 검사를 잘 마치고 퇴원 조치를 한 뒤 다른 파트로 가게 되었어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환자분이 이식 수술 후 예상치 못한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죠. 그분이 농인이 아니었다면, 혹은 수어 통역사가 있었다면, 농인과 좀 더 잘 소통해 보려고 하는 의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안타까움이 사무쳤어요. 농인들은 수어가 아니면 본인의 의사를 전할 방법이 없는 데다, 이들을 대변해 주는 사람도 드물죠. 무엇보다 농인들의 수조차 정확히 집계되지 않을 정도로 농인 사회의 소외 문제는 심각해요.
수어를 할 수 있는 의료인이 드문 현실에서 가장 개선이 시급한 의료 시스템은 무엇인가요?
먼저 농인들에게 제대로 된 의료 정보가 제공되어야 해요. 수어 통역이 제공되는 건강 정보들이 극히 부족하거든요. 농인들에게 한국어는 사실상 ‘제2외국어’나 다름없기 때문에 글만으로는 이해가 어려운 경우가 많아요. 따라서 자신의 건강에 대해 정확히 판단하기가 쉽지 않죠.
둘째로는 병원 진료 시 수어 통역이 지원될 필요가 있어요. 농인들은 원하는 시간에 통역사와 약속을 잡기가 매우 어려워요. 특히 야간, 주말, 휴일 또는 응급 상황 발생 시에는 더욱 그렇죠. 의료 수어 통역 자체도 어려움이 따라요. 의료진이 말하는 전문 용어나 진료 내용을 바로 이해하기 어렵거니와 이해하더라도 수어로 표현하기가 까다로우니까요. 의료 전문 수어 통역사가 현장에 절실히 필요한 이유죠.
셋째로는 충분한 진료 시간과 통역 시간이 필요해요. 수어 통역사는 어려운 의학 정보를 이해하기 쉽게 통역해야 하고, 농인은 그 내용을 이해하고 판단해서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죠. 그러니 시간이 두세 배가 드는 게 당연해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환자 한 명당 충분한 진료 시간을 할애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죠. 게다가 의료진마저 자세한 설명 없이 불친절한 태도를 보이면 농인은 제대로 된 진료를 받지 못한 채 외래 문밖을 나올 수밖에 없어요. 실제로 이런 부정적인 경험들이 농인의 의료 접근성을 떨어뜨리는 주요한 이유가 돼요.
현재 장애인 의료단체에서 여러 활동을 하고 계시잖아요. 농인을 비롯한 장애인 정책 또는 시스템에 기여하고 싶은 부분을 말씀해 주세요.
제가 인턴, 레지던트 수련을 받은 병원은 수술이 연 7만 건, 일 평균 외래 환자 수가 1만 3000명으로 대학병원 몇 개를 합쳐 놓은 거대한 규모예요. 그런데 그곳에서 근무한 5년간 외과에서 성인 중증 장애인이 수술받는 걸 본 적이 거의 없어요. 소위 ‘BIG 5’라고 하는 서울 유명 병원들의 문턱이 중증 장애인들에게 유난히 높은 건 아닌지 생각해 볼 만한 문제죠. 이에 대한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서 저는 농인을 비롯한 중증 장애인들이 편리하고 효율적으로 진료받을 수 있는 종합병원을 만들어 가는 것을 꿈꾸고 있어요.
현재 몸담고 계신 병원에서 시도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요?
얼마 전에 저희 병원의 보직자 교수님께 건의를 했어요. 정부에서 추진하는 ‘장애친화검진센터’를 우리 병원에 유치하는 동시에 병원에 상주하는 수어 통역사를 고용하면 좋겠다고요. ‘가난한 이들이 우리의 주님입니다’라는 성빈센트병원의 소명을 따라 소외 계층, 특히 장애인 진료에 특화된 병원이 되면 좋겠다는 소망을 말씀드렸죠. 이 말씀을 드린 뒤 며칠이 지나 그 보직자 교수님이 한 농인 환자를 담당하게 되셨어요. 교수님의 요청으로 제가 수어 통역을 했고요. 덕분에 수어 통역사의 필요성을 한 번 더 강조할 수 있었죠.(웃음)
말씀마다 농인을 향한 깊은 애정과 우정이 전해집니다. 그동안 농인들과 교제하면서 쌓은 추억 가운데 특별히 즐거웠던 기억을 나눠 주시겠어요?
수어를 하나둘씩 배우며 농인들과 서서히 소통의 물꼬를 터 갈 무렵, 그러니까 그들과 교제한 지 1년 정도 지났을 때, 저에게도 수어 이름이 생겼어요. 정확히 말하면 농인들이 저에게 이름을 지어 준 거죠. 농인들은 본인의 이름을 지화(한글 자모음이나 알파벳, 숫자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표시하는 방법-편집자 주)로 구사하지 않거든요. 일상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지화로 부르기에는 번거로우니까요. 주로 얼굴 특징을 이용해서 수어 이름을 만들어 줘요. 수어 이름이 생겼다는 것은 농인들이 자주, 다정하게 부를 만큼 깊고 친밀한 대상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해요. 농인들에게 진정한 친구로서 받아들여진 순간, 그 순간이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네요.
의사로서 또 신앙인으로서 롤모델로 삼고 싶은 사람은 누구인가요?
의사로서는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의 외과 주임 교수이자 성빈센트병원에서 저를 지도하시는 조현민 교수님을 존경해요. 수술 잘하는 의사, 환자에게 친절하고 설명 잘하는 의사, 최선의 의사 결정(decision making)을 하는 의사, 제자들을 잘 가르치는 의사. 이중 한두 가지에 해당하는 의사는 찾을 수 있지만, 네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의사는 정말 찾기 어려워요. 그런데 이 네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외과의사로부터 수술과 진료를 배울 수 있으니 저에게는 큰 복이죠.
신앙인으로서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전 대표이신 송인수 선생님을 존경해요. 풀기 어려운 사교육 문제, 기업의 채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생을 바친 분이죠. “사교육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그 문제에 자신의 인생을 던진 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 한 사람이 되겠다”는 마음으로 사명을 붙잡고 나아가는 모습, 그 믿음과 용기를 존경해요. 장애인 문제도 마찬가지죠. 장애인들, 특히 농인들의 건강 문제가 답보 상태에 있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자신의 인생을 던진 한 사람, 한 명의 의료인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하나님이 저를 그 한 사람으로 부르신다면 과연 나는 내 인생을 던질 수 있을까 생각해 보게 돼요.
교수님을 향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기대됩니다. 끝으로 9월 23일 ‘세계 수어의 날’을 기념해 한 말씀 부탁드려요.
배우면 배울수록 아름다운 언어인 수어를 모두가 조금이나마 경험해 보면 좋겠어요. 요즘은 수어를 배울 수 있는 콘텐츠들이 다양화되어 있으니까요. 굳이 수어가 아니더라도 소통이 잘 안 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가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그러한 열린 마음가짐과 태도로 살아가다 보면 시야가 열리고 세상이 확장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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