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사랑의 십자가로(路)
Guideposts 2024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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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십자가로(路)
거기, 구름의 길이 보였다. 물끄러미 구름의 이동 경로를 눈으로 좇으며 영혼의 길에 대해 생각했다. 정처 없이 흐르는 듯하나 결국에는 닿게 될 영혼의 종착점에 대해서. 평창군 대화면 개수리의 드넓은 하늘 아래 안온한 둥지처럼 자리한 산마루예수공동체는 ‘영원’을 묵상하게 하는 장소였다. ‘회개한 자가 거하는 거룩한 땅’으로 구별되어 남겨진 땅. 거친 밭에서 돌을 캐내고, 물길을 내며, 땅을 개간해 자연의 산물을 내게 되기까지 이주연 목사가 흘린 땀과 눈물은 허다하다. ‘영원’을 향해 길을 내는 마음으로 황무지에 ‘영혼’의 길을 낸 이주연 목사, 그가 깨달은 십자가 사랑의 진리가 고요한 산자락 곳곳에 새겨 있다.
‘산마루’에 오니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이 임하는 것 같아요. ‘산마루’라는 이름에 담긴 의미를 말씀해 주세요.
‘산마루’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산’과 바탕이자 근본 곧 파운데이션을 의미하는 ‘마루’를 결합한 이름이에요. ‘종교’의 종자도 ‘마루 종(宗)’ 자죠. 우리말로도 ‘산마루’가 아름답잖아요. 산마루는 단순히 산이 높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자리입니다.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평안과 기쁨을 얻으며, 치유와 회복이 일어나는 그러한 자리를 의미해요.
목사님이 ‘처음’ 경험하신 산마루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인간이 순수한 감성으로 산과 강과 하늘을 보면 어린아이든 어른이든 상관없이 아름다움과 숭고함을 느끼죠. 저는 어릴 적 한강 변에서 자랐어요. 저녁놀이 그토록 아름다운 곳이 없지요. 1960년대에는 한강 변에 강만 있는 게 아니라 산도 있었거든요. 절두산, 선유도, 밤섬 등…. 훼손되기 전에는 참으로 아름다웠죠.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제 안에 크게 자리해요. 특히 저는 산을 무척 좋아했어요. 또 공교롭게도 초·중학교 시절에 보이스카우트를 해서 산중 체험을 많이 했죠. 나무, 바람, 절벽, 바위, 또 비가 쏟아지는 산속 풍경에 매료되어 늘 산을 다녔어요. 그 어린 시절의 경험이 제 안의 원천적 자원이 됐죠.
제가 1990년대 중반에 「산마루」라는 시를 썼어요. 가장 존경하는 은사님이 은퇴 후 진부령에 계셨습니다. 그곳 산장 교회에 설교자가 없어 제가 자원해 주말마다 왕복 12시간 거리를 오가며 설교했어요. 진부령에서 30분은 더 올라가야 하는 ‘흘리’라는 곳입니다. 주일 방문객들이 떠나고 나면 그 고요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 산중 고요함 속에서 부활절 즈음 그 시를 쓴 거죠. 만물 속에 하나님의 영, 곧 하나님의 의식이 반영되어 있다는 것,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을 통해 계시하신다는 것을 깨달은 거예요. 대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 하나님의 의식, 하나님의 깊이를 묵상하며 창조주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손길을 느낀 거죠.
2006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노숙인 사역을 해 오셨잖아요. 돌봄과 도움이 필요한 수많은 약자 가운데 ‘노숙인’을 마음에 품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기독교사상』 주간으로 일하던 1990년대 중반에 수도원적인 공동체를 구상하며 기도를 해 왔어요. 그러다가 2001년, 영성 운동을 위해 교회를 개척했죠. 책을 만들고, 글을 쓰고, 사상이나 신학적 논의를 하고, 강연하는 것만으로는 진정한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교회를 우리 집 마루에서 시작했는데, 점점 성도가 늘어나서 몇 차례 이사 끝에 현재의 신공덕동에 건물을 마련했어요. 그렇게 한창 교회가 부흥되어 갈 때 하나님께서 노숙인들을 붙이신 거예요.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게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걸 알죠.
영성 공동체는 각기 다른 계층의 사람들이 어우러지지 않으면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어 갈 수 없어요.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건강하거나 건강하지 못하거나, 많이 배웠거나 못 배웠거나, 젊거나 늙거나,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병들어요.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노숙인을 보내시지 않았다면 불을 보듯 뻔해요. 학계와 문화계와 예술계의 고학력자들, 엘리트들만 모이는 중세 수도 공동체처럼 됐겠죠. 그런데 어느 날 20~30명 정도 오던 노숙인들이 주일 아침에 무려 150명 넘게 교회에 들이닥치게 하신 거예요. 고상한 공동체를 막 깨부숴 놓으신 거죠. 이 일 이후 온 성도가 힘을 다해 그들을 섬기며 기쁨과 감격을 누리고 귀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한편 교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감내해야 했어요.
여러 어려움 중에도 노숙인 사역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백사실 계곡에서 ‘사랑의 농장’을, 포천에서 ‘해맞이노숙인공동체’를 7년간 운영하셨어요.
노숙인들을 보자 ‘이들을 서울역에서 나오게 해야 한다’는 생각이 처음부터 들더라고요. 그들을 나오게 하려면 그들이 살 수 있는 거주지와 일터를 마련해야 했어요. 그러려면 이분들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변화되지 않으면 같이 못 살거든요. 때마침 제가 글을 쓰려고 종로구 부암동 백사실 계곡에 버려진 터를 빌려 둔 곳이 있는데, 그곳으로 노숙인들을 불러들였어요.
“백사실로 오기만 해도 하루에 1만 원씩 주겠다” 한 거죠. 일을 하든 하지 않든 일단 서울역에서 나와 낮에라도 피해 있으라고 한 거예요. 그 땅이 온통 농업 폐기물로 가득해 쓰레기 더미였지만 본래 경치가 참으로 아름다운 곳입니다. 그곳을 노숙인 쉼터로 사용하게 된 거죠. 그렇게 2년을 했더니 저를 지켜보던 어느 분이 당신 소유의 사용하지 않는 농장이 있다며 저더러 쓰라고 하셨어요. 그리하여 포천에 있는 땅 1만 2천 평을 무상으로 사용하게 되었어요. 우선 숙소를 중산층 생활 가능 수준으로 리모델링해 거주지를 제공했습니다. ‘해맞이노숙인공동체’가 그렇게 시작된 거죠. 그러다 나중에 한 형제가 전소(全燒)시켜 그 집은 사라졌습니다.
‘산마루해맞이공동체’와 ‘산마루예수공동체’의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포천의 산마루해맞이공동체를 7년간 꾸려 가면서 깨달은 사실이 있어요. 그분들로만 따로 공동체를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이었죠. 제가 그곳에 늘 거주할 수가 없어 1~2주에 한 번씩만 오가다 보니 문제가 많이 발생했어요. 과거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탈하거나, 속이는 일들이 발생했죠. 그분들만 지내면 수용소처럼 되고 맙니다. 그분들만 모아 두지 말고 다양한 계층이 어우러지도록 비율을 구성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이에 산마루예수공동체는 3:3:4 비율로 어려운 이웃(30%), 청년(30%), 성도(40%)로 구성되도록 노력하고 있어요. 노숙인 형제들이 비율상 더 많으면 그들에게 끌려들어 가게 되거든요. 그렇게 되면 강한 규율이나 율법을 적용하게 돼요. 강제성이 작용하면 사람이 안 바뀌죠. 건강한 영과 육을 가진 분들, 그런 안정된 사람들이 다수가 되어야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어요. 그리고 산마루예수공동체는 신앙적으로 재정적으로 교회와 함께하기 때문에 유지가 가능합니다. 특히 재정적 서포트 이상으로 성숙한 사랑을 지닌 성도들이 참사랑으로 연결돼 있어야 해요. 이 사랑과 영적인 힘이 상처 입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치유와 지지가 됩니다.
그런 면에서 산마루예수공동체가 지향하는 정체성과 가치는 ‘영성’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그렇죠. 인간은 빵만으로 해결이 안 돼요. 인간의 문제는 유물론적인 사유, 곧 물질로 모든 걸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안 풀려요. 자본주의의 근본 문제도 그렇고, 공산주의의 근본 문제도 똑같아요. 공산주의는 물질을 무조건 똑같이 나눠 버리면 될 것처럼 생각한 거예요. 반면에 자본주의는 능력껏 벌어 물질을 풍족하게 누리며 먹고 살면 해결된다고 보는 거고요. 둘 다 물질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본 거죠. 우선 노숙인들은 먹고 자는 문제를 해결해 줘야 돼요. 육신도 치료해 주어야 해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니까요!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해결이 안 됩니다. 진리가 있어야 해요. 하나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 그 말씀이 들어가면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이 오죠. 본인들이 먼저 알아야 해요. 그러면 회개가 나오는 거예요. 인간은 물질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 ‘영적인 존재’라는 각성이 생깁니다. 자신들의 실패와 고통이 물질 때문이 아니라 정신 자세와 죄 때문인 것을 깨닫죠. 회개가 은혜요, 은혜의 시작은 회개인 것을 깨닫고, 거룩한 길로 나갑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거예요.
목사님이 생각하시는 ‘말씀’의 핵심은 무엇일까요?
말씀, 그것의 핵심은 사랑이죠. 그 사랑의 절대적인 에센스가 바로 ‘십자가의 사랑’이에요. 그보다 더한 사랑은 이 시공간 안에서, 인류의 역사 속에서 지어낼 수가 없어요. 그보다 더한 걸 지어낼 수 있다면 그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는 거죠. 하지만 인간은 대속적 십자가의 사랑, 그 이상을 연출하거나 성취할 수 없어요. 그러니 누구도 그리스도가 될 수 없어요. 오직 한 분뿐인 그분만이 궁극적인 사랑을 보여 줬고, 그걸 통해서 진짜 하나님이신 걸 입증하신 거예요.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으니까 생생하게 진짜를 보여 줄 수 있었지요. 이토록 완벽하게 구원의 사랑을 보일 수는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아니시죠.
예수님은 스스로 선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구원은 선하고 선하지 않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누가 어떻게 죄를 짓게 되는가가 문제죠. 그리고 우리는 죄인일 뿐이라는 것. 그에 대한 깨달음이 있어야 회개가 가능하고,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거예요. 제게 노숙인 자체가 스승은 아니지만, 주께서 그들을 만나게 하셔서 그 진리를 일깨워 주신 거죠. 인간의 문제가 뭔지를 보고 그 문제를 풀어 가도록 더 심도 있게 저를 이끌어 주신 거예요. 사랑 중에 제일 큰 사랑은 죄를 대속하는 사랑입니다.
노동-기도-말씀의 삼각 구도를 지키는 산마루예수공동체의 일과가 궁금합니다.
우리는 일상을 가장 단순화시켰어요. 처음에는 규정이 많았어요. 그런데 규정이 많아지면 율법적으로 돼서 좋지 않아요. 그래서 단순화시켰죠. 6시에 새벽기도 하고, 7시 반에 아침 먹고, 12시에 점심 먹고, 6시에 저녁 먹고, 오후 8시에 감사 기도회 하고, 10시에 잠자리에 들어요. 노동은 하루 3시간입니다. 식사 시간에는 서로 마주 보지 않고 경관을 바라보며 침묵 식사를 해요. 80% 먹고 120% 감사하죠. 자기 전에는 하루를 마감하며 ‘영성일기’를 통해 그날의 감사 제목을 쓰고 기도를 해요. 이러한 기본 틀에서 하루에 3시간 노동을 하는데, 그보다 더 많이 하면 안 돼요. 큰 목표량을 가지고서 일하면 그 목표가 주인이 되고 사람이 객이 됩니다. 영적인 리듬과 가치가 혼란스럽게 되죠. 알맞은 노동은 치유와 회복, 더 나가서 예술과 창조가 됩니다. 분명해요. 대자연 속의 노동은 ‘치유’다! ‘자기로부터의 해방’이다! ‘창조’다! 저는 이렇게 말하죠.
산마루예수공동체에서 주된 노동은 ‘농사’잖아요. 농사에 깃든 섭리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자연의 흙을 만지면서 노동을 하면 남들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치유를 경험합니다. 영과 혼과 육의 종합적인 치유가 일어나죠. 우선 흙을 손으로 만지면 몸속의 나쁜 기운이 나가요. 자기 안에 쌓인 나쁜 것들과 분노가 풀리고, 그럼으로써 또 여유가 생기죠. 한 예로 이곳 텃밭 채소들의 경우 형제들이 씨를 뿌리고, 물도 줘요. 그러다 보면 아침마다 보고 싶어져요. 잘 자랐는지 궁금해하며 꾸준히 가꾸게 됩니다. 이러한 물을 주는 행위는 곧 살리는 마음, 사랑의 마음을 깨어나게 하죠. 생명을 살리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라는 걸 보면 보람이 느껴져요. 아주 작디작은 싹이 살까 말까 했는데 결국에는 잘 자라는 걸 직접 경험하는 거죠. ‘이게 되네’ 싶어지면 그다음에 또 살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요. 마침내 사랑의 마음과 성취감을 얻습니다.
노숙인들이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어 적응하기까지 일정 부분 어려움을 겪기도 할 것 같아요. 주로 어떤 과정을 겪는지요?
우리 공동체는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고, 나갔다가도 다시 들어올 수 있어요. 초기에는 막 드나들어도 돼요. 알코올중독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은 우선 무조건 쉬라고 권해요. 그런데 알코올중독인 사람은 술 생각이 나서 오래 못 있어요. 3박 4일이면 잘 견디는 거죠. 몸이 좋아지면 다시 나가요. 그러다 또다시 술 먹고 몸이 다 망가지면 다시 들어오고요. 그렇게 여러 차례 드나들다가 회복돼 가죠. 건강한 믿음의 성도들이 함께하는 공동체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예요. 교인들이 와서 이들을 품고, 중보 기도해 주면 변곡점이 생겨요. 평생에 그런 사랑을 받아 본 적 없는 이들이 진짜 사랑을 경험하는 거예요. 그런데 ‘진정한 사랑’은 아무 때나 느껴지는 게 아니에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하고, 무엇보다 ‘은혜’가 임해야 하죠. 그래서 그 사랑이 받아들여지는 순간이 와야 해요. 특별히 찬양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특히 연세가 있으신 여성 권사님이나 사모님이 찬양하고 기도해 주면 큰 은혜를 받아요. 십자가 사랑과 모성에 대한 그리움이 있기 때문이죠. 공동체가 아니면 바뀔 수가 없어요. 자기가 자란 가정이나 복지제도만으로는 어렵지요. 그리고 크리스천 공동체가 아니면 어렵습니다. 죄를 용서하는 십자가 예수의 사랑, 그 구체적인 큰 사랑이 있기에 가능한 거예요.
산마루예수공동체가 자리한 항아리골을 ‘마지막 십자가’를 지는 영성의 장소로 여기시잖아요. 광야에 길을 내듯 한땀 한땀 가꾸신 흔적이 보입니다.
저는 열여섯 살 적에 제가 고난을 받고 죽어서 예수님 품에 안겨 올라가는 모습을 꿈으로 체험한 적이 있어요. 그 기억이 일생토록 나를 지배하죠. 십자가의 길이면 무조건 내가 가야 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광야를 자처했죠. 저는 세 번의 광야를 거쳤어요. 첫 번째는 『기독교사상』 주간직을 그만두고 영성 운동을 시작한 것. 두 번째는 우리 집 마루에서 개척 교회를 시작한 것. 마지막은 바로 이 산마루예수공동체를 시작한 것이죠. 세 번째 광야에 들어서며 ‘난 돌아가지 않는다. 나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나는 광야에서 끝난다’라고 생각했어요.
그동안 이곳을 가장 자연스럽게, 손대지 않은 것처럼 손대려고 애썼어요. 5천 평 되는 이 앞의 밭은 1미터 깊이에 있는 돌을 싹 꺼낸 거예요. 한 100트럭이 넘게 나왔어요. 크고 좋은 돌들은 다른 위쪽으로 다 끌어올렸죠. 돈이 없어서 남들에게 맡길 수 없어 중고 포크레인, 트랙터를 마련했어요. 그리고 직접 운전을 했죠. 처음에는 콩 하나 심기 어려운 땅이었어요. 기어코 돌을 다 꺼내어 옥토를 만든 거죠. 이곳은 하늘 아래 커다란 둥지 같아요. 해발 800미터 높이에 이만한 평지가 자리하기 쉽지 않죠. 이 안으로 골짜기 물이 다 모여들어요. 산꼭대기에는 물이 없어서 걱정인데 여기는 물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래서 물 관리 작업을 그동안 많이 했어요. 이곳의 고요함과 아름다움과 자연의 힘이 엄청나요. 하나님이 자연을 통해 생명을 부여하시는 거예요. 사랑의 힘이기도 하죠.
2001년 개척하신 산마루교회는 ‘처음 교회’의 영성을 계승하는 재가 수도자 공동체이면서 21세기 시대의 대안을 모색하는 교회잖아요. 특히 ‘문화적 창조력’을 강조하신 점이 인상적입니다. 이 시대에 교회의 문화적 창조력을 어떤 식으로 발현할 수 있을까요?
문화적인 창조의 힘도 결국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거예요. 사랑의 에너지가 아닌 것은 창조하지 않고 파괴해요. 사랑으로 출발해서 끝까지 그것을 추구하면 실패하는 과정이 있어도 결국 마지막은 열매가 있어요. 그 스토리가 사람을 살려요. 소설도 해피엔딩이 아닌 비극으로 결말을 내도 끊임없는 사랑의 과정을 그린 것은 인간이 많은 걸 깨닫고 자기의 삶을 새롭게 창조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일으킵니다. 고전이 되는 것과 한 시대에 막 들끓었다가 사라지는 것의 차이는 뭘까요?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이 있느냐 없느냐가 결정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깃들어 있는 이 대우주와 자연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해야 해요. 그러면 창조력이 생기고, 그것은 고전으로 남아서 인간의 마음을 울리고 치유하며 소망을 줘요. 자유와 해방을 이루죠. 우리가 자연을 깊이 묵상하며 고요 속에서 울리는 근원적인 소리를 듣게 되면 그 어떤 거대한 조화로움과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을 언어로 표현하면 ‘사랑’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그 사랑으로 우주를 창조하셨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온 우주에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되죠. 그게 기독교 창조 신앙의 에너지이며, 영력입니다. 생명과 구원의 문화를 일으키죠. 현재 문화가 왜 이렇게 창조적이지 못하고 이렇게 파괴적인가. 결국은 사랑의 근원이 끊어졌기 때문이에요.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리는 성탄절이 다가옵니다. 목사님이 정의하시는 ‘사랑’이란 무엇인지 듣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한1서 4:16). 창조주이시며 구원의 주이신 성삼위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이 나옵니다. 행위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사랑이신 그분 자체에서 나오는 거죠. 진정한 사랑은 감정이나 육적인 사랑과 달라요. 존재론적인 거죠. 존재론적이라는 표현 말고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요. 예수는 대가를 바라지 않고 죄를 용서하기 위해 자기를 바침으로써 사랑을 보여 주셨어요. 그게 바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예요. 인간이 안 바뀌니까 자기가 죽은 거예요. 죄는 씻어야 되겠고, 인간이 안 바뀌는데 살려야 되겠고, 어쩌겠어요! 자기가 죽는 수밖에 없는 거죠. 그 안 바뀌는 죄의 대가를 뒤집어쓰려고 한 게 예수의 사랑이에요. 그것 하나 배우려고 저도 지금까지 이 과정을 겪은 거죠.(웃음) 예수의 고난, 그 십자가 사랑! 사랑 중의 사랑, ‘십자가 사랑’만이 유일하게 온전한 사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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