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동행의 역사(History)를 쓰다
Guideposts 2025 |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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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의 역사(History)를 쓰다
인간의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앞과 뒤가 상충하는 비논리의 영역들.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린도후서 6:10)의 삶에서 역동하는 그리스도의 역설(paradox)이 바로 그러하다. 다 이룬 듯했으나 도리어 칠흑의 절망이 엄습하던 시절, 절실하게 하나님을 붙들고 빛으로 나아간 ‘빡공시대’ 이보람 대표는 누구보다 그 역설을 깊이 체험했다. ‘일타 강사’라는 일인자 타이틀과는 견줄 수도 없는 생명의 면류관을 소망하며 ‘빡공호’에 다음 세대의 영혼을 싣고 항해하는 이보람 대표강사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십수 년 동안 강사로서 학생들에게 사회와 한국사를 가르쳐 오셨어요. 가르치는 일을 사명으로 삼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가르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웠기 때문에 사업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부딪히고 경쟁하며 뭔가를 일궈 내는 일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어요. 그런 제 생각과는 별개로 저는 어린 시절부터 주위 사람들로부터 말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어요. 저희 엄마가 제가 어릴 때 했던 이야기를 해 주시곤 하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어린아이가 한 말 치고 제법 논리 정연하더라고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재주였던 거죠. 희망하는 직종은 카피라이터였지만 입시를 잘 못 치르는 바람에 뜻하는 전공을 선택하지는 못했어요. 전공 과목을 고심하던 중에 문득 엄마의 칭찬이 떠오르더라고요. “보람이가 다른 건 몰라도 사회는 잘해.” 그렇게 해서 사회교육과에 진학하게 되었어요. 진학 후 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는데 청소년들을 보자마자 제 눈에 콩깍지가 씌었어요. 학생 한 명 한 명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거예요. 그래서 이 일에 뼈를 묻게 되었어요.(웃음)
선생님에게 사회와 한국사는 어떤 의미인가요?
어린 시절에 안 좋은 꿈을 참 많이 꿨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인지 두려움이 많았죠. 예를 들어, 뉴스를 보면 사건이나 사고, 국제사회의 이슈 등이 보도되잖아요. 저는 그 일들이 비단 남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았어요. 저 일의 당사자가 내가 될 수도 있다는 공포심 때문이었죠. 그런데 청소년기에 접어들고, 특히 하나님을 만나면서 그 공포심이 책임감으로 바뀌어 갔어요. ‘저들은 저렇게 고통스러운데 내가 이렇게 편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저 일에는 나의 몫이 있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럽게 역사가 좋아지더라고요. 역사책을 펼치면 그 시대 그 사람들의 마음이 느껴졌어요. 임진왜란의 이순신 장군, 삼일운동의 유관순 열사 등 그 인물들이 서 있던 그 장소 그 자리를 상상하면서 그들의 마음을 오롯이 느끼는 거죠.
30대 초반에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성경을 보니 ‘역사(Histroy)’라는 단어가 새롭게 와닿더라고요. 성경이 ‘하나님의 스토리’라는 것,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는 분이며 시간의 창조자이고 알파와 오메가의 신이라는 사실을 절감한 거죠. 학문으로서는 물론이고 성경의 역사를 후손에게 계승시키는 사람으로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해 주셨다는 사실을 더 확고히 깨닫게 되었어요.
선생님은 학창 시절 어떤 학생이었나요? 그 시절에 만난 하나님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사실 저희 가정은 무속 신앙을 믿는 집안이었어요. 엄마가 많이 아프셨기 때문에 항상 집에서 굿판을 벌였죠. 집안 대대로 귀신이 붙었다는 이야기를 계속 들으며 자랐어요. 영적인 기운을 체감하며 자란 거죠. 그런 악한 영들, 귀신들이 꿈에 자주 나와 늘 두려웠어요. 그 시절 저는 자존감이 낮은 아이였죠. 그러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으로 여름성경학교를 가게 되었어요. 저희 부모님이 무속 신앙을 따르기는 했지만 교회에 대한 이미지가 좋았기 때문에 보내 주셨죠. 교회에서 들은 성경 말씀은 제게 무척 스펙터클하게 다가왔어요. 물 위를 걸으시며, 귀신을 쫓아내시는 예수님.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귀신이 쫓아올 때 빨리 교회로 들어가면 나는 살 수 있을 거야.’ 아마 그때부터 저는 교회가 이 땅의 소망이라는 것을 선명히 알았던 것 같아요. 당시 제가 살던 동네는 철거촌이어서 남자들은 다 공사장에 나가고 여자들은 파출부로 일을 했죠. 그런 칠흑 같은 동네에서 저를 불러내신 하나님은 질그릇 같은 제 안에 예수라는 보배를 담게 하셔서 어디를 가든지 전할 수 있었어요. 사람을 구별하지 아니하는 공평하신 하나님, 약한 자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그것이 제가 어린 시절에 만난 하나님이에요.
어린 시절의 기억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나요?
지금 우리가 2020년대를 살고 있지만, 저를 형성한 가치관은 1970~1980년대에 머물러 있어요. 부모님 세대의 고통을 어렸을 때부터 봐 왔기 때문에 그런 정서가 제 안에 녹아 있어요. 그런데 지금 시대는 가난하지 않잖아요. 가만히 보니 지금의 가난은 풍요로 인한 정신의 가난이더라고요. 저는 역사를 가르치다 보니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요. 그들이 모진 고문 속에서도 조국이라는 이름 앞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정신의 힘 덕분이잖아요. 정신이 무너지면 다 무너지거든요. 그런데 지금 세대에는 그 정신이 부재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가지고 있던 어린 시절의 감성을 아이들에게 심어 주려고 노력해요. 그런데 그게 참 쉽지 않아요. 우리 아이들이 인생을 살다가 어떤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것에 대입할 수 있는 역사적 정신을 가르치려면 과거의 감성을 정성스럽게 가르쳐야 해요. 아이들이 그 시대를 살아온 것처럼 느끼도록요. 이걸 세세하게 다 설명하며 가르치는 게 어떻게 보면 좀 귀찮은 일이에요. 이것도 정성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 시대를 기억하게 해 주고, 다음 세대를 통해서 그다음 시대에도 계속 전승해 나가게 하는 일이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정말 살아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해요.
치열한 인강(인터넷 강의) 시장에서 소위 ‘일타 강사’로 활약하셨는데요. 아이러니하게도 오랜 시간 공황을 앓으셨다고요.
솔직히 일타 강사의 현실이 행복하지는 않았어요. 일타 강사를 목표로 강단에 선 게 아니라 그저 더 많은 학생들에게 내 강의를 들려주고 싶어서 달려온 길인데 어느 날 보니 일타 강사가 되어 있더라고요. 막상 일타 강사가 되고 나니 그 자리를 지켜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들었어요. 내 안에 계속 ‘이건 내 길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죠.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무료 강의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어요. 어쩌면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그런 선생님이 되지 않을까 하는 설렘도 한 20퍼센트 있었어요. 일타 강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하고 나서 공황 증상이 온 것은 아니에요. 어느 날 갑자기 악한 영이 저의 몸을 사로잡았죠. 극단적인 공포감, 불면증, 우울감 등 부정적인 감정이 총체적으로 찾아왔고, 무엇보다 저의 죄를 송사하는 속삭임이 24시간 끊임없이 들려왔어요. 그때 깨달았죠. 그동안 내가 한 신앙생활은 문화생활에 불과했다는 걸.
그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영적 눌림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도원에서 치열하게 기도하며 지냈어요. 덕분에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는 사실만은 철저히 붙들 수 있었죠. 그저 혼자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다가 3개월 정도 지나 코너에 몰릴 때까지 몰렸을 때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드렸어요. “하나님, 당신은 선하신 분이니까 저를 죽여 주세요.” 그러고 나서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는데, 한 줄기 빛처럼 강렬한 메시지가 제 안에 들어오더라고요. 선하신 하나님은 나를 죽이실 리가 없다는 것. 나에게는 할 일이 있기 때문에 죽을 수 없다는 것. 그때부터 기도가 바뀌었어요. “하나님, 말씀하신 대로 다 믿어 보겠습니다. 저를 살려 주세요.” 그러고 나서 성경 하나 붙들고 죄의 송사를 말씀으로 끊고 또 끊어 냈죠.
죽음에서 생명으로 전환이 이루어졌군요. 이후의 행보도 달라졌을 것 같아요.
그즈음 어린이전도협회에 가서 50명을 전도하는 훈련을 했는데요, 가장 슬프고 절망스러울 때 ‘기쁜 소식’ 곧 복음(Good News)을 전하며 치유가 되어 갔어요. 당시 남편과도 떨어져 지냈고 가족들과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늘 외로웠는데요. 어느 수요일, 오후 4시쯤 일찌감치 교회에 가서 덩그러니 앉아 기도를 하는데 저 자신이 벌레 같은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 뛰더니 소망이 솟았어요. “보람아, 내가 네 위에 교회를 세울 거다.” 그런 내적 음성이 강력하게 들려왔어요. 그날 이후로 매주 토요일에 아이들을 한 명씩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주기 시작했죠. 처음에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잘 안 들렸는데, 한 6개월쯤 지나니까 이 아이들이 처한 상황이 깊이 와닿더라고요. 이 아이들을 어떻게든 도와주기 위해 모이기에 힘쓰다 보니 저의 아픔은 자연스레 사라지게 되었죠. 이것이 사람을 온전케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생각해 보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진짜 스승’이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던 것 같아요.
지난한 터널을 지나는 가운데 2014년 ‘빡공시대’라는 이름의 무료 강의를 개설하셨는데요. 그때 경험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나눠 주세요.
일타 강사를 내려놓자 업계에서 “이보람이 미쳤대” 하는 소문이 나 있었는데요.(웃음) 그 무렵 ‘빡공시대’ 카페를 개설하고 ‘다음 tv팟’ 플랫폼에 무료 강의를 올렸어요. 그런데 별다른 반응이 없더라고요. 하지만 저는 무료 강의를 하나님께 선물로 올려 드리려고 했기 때문에 더 널리 흘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당시에는 유튜브가 그리 알려지지 않았을 때인데, 저희 실장님께 유튜브에 강의를 올리자고 말했어요. 그렇게 강의를 올린 뒤 나흘이 지나 아이들이 유튜브를 통해서 미친 듯이 들어오기 시작했죠. 그 배경을 되짚어 보면요. 2014년 4월 16일에 세월호 사건이 터졌잖아요. 그때 제가 하나님께 한 명이라도 살려 달라고 엄청나게 기도를 했거든요. 2014년 4월 20일 부활절이 지나 이틀 후 저희 교회에서 열린 부흥회에 다녀오는 길에 전화를 받았어요. “선생님, 지금 2시간 사이에 200명이 카페 가입을 했어요!” 그러고 나서 또 일주일 사이에 1만 명이 가입을 했고요. 아마 1년 사이에 가입한 학생이 4만~5만 명쯤 된 것 같아요. 당시 저는 마음이 낮아져서인지 이 수많은 아이들이 다 구원을 못 받을까 봐 염려가 되더라고요. 이 구원이라는 게 얼마나 큰 건지 아니까. 그래서 울면서 기도를 드렸죠. 그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네가 살려 달라고 했던 아이들을 보낸 거다. 이 아이들을 ‘빡공호’에 잘 태워서 살려 내야 한다. 빡공호에 탄 아이들은 모두 살려 줄 것이다”라고요.
그야말로 ‘빡공시대의 기적’이군요. 현재 빡공시대에서 운영하는 ‘개척 스터디’(구 개척 독서실)의 세 가지 선언이 참 인상적이던데요. 개척 스터디를 통해서도 선한 역사가 많이 일어날 것 같아요.
첫째, 자기의 일은 자기가 스스로 해결한다. 둘째, 오늘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는다. 셋째, 성령의 능력으로 일어난다. 이것이 개척 스터디의 세 가지 선언인데요. 저희는 우리 아이들에게 두 가지를 가르쳐요.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쟁기예요. 이 두 가지가 되어야 해요.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도 실력이 있어야 하고 세상 속에서도 실력이 있어야 살리는 자가 될 수 있죠. 저희는 첫째로 영적인 부분을 채워 주기 위해 애를 많이 써요. 매주 금요일에 함께 철야하며 기도하고 계속 성경을 읽고요. 겨울방학에는 ‘말씀 학교’를 열어요. 새해 첫날, 그러니까 송구영신의 때에 술이 아닌 말씀에 취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서죠. 개척 스터디의 책상 위에는 늘 성경이 올려져 있어요. 공부하다가 힘들면 성경으로 하나님과 대화하고 다시 공부에 집중하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죠. 그다음에는 ‘의로운 활동’을 권유해요. 뜨개질, 댄스 등 자신이 즐길 수 있는 활동이요. 단, 핸드폰은 절대 안 돼요. 어떤 경우에도요. 그 활동을 각자 혼자 즐기는 데서 그치지 않아요. 요양원에 있는 어르신들을 찾아가 위로해 드리거든요. 뜨개질로 뜬 옷을 선물해 드리기도 하고, 춤을 연습해서 공연을 하기도 하죠.
선생님의 성함처럼 ‘보람’된 활동이네요. 가르치는 일의 가장 큰 ‘보람’을 말씀해 주시겠어요?
사실 저는 가르치는 일이 힘겹게 느껴질 때가 좀 많거든요. 제가 흥이 많은 사람이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감성적인 사람인 것도 같아요. 그래서 참 힘든 점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가르치는 일이 보배롭고 또 이것을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어요. 이 일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과 친해지고, 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에요. 하나님이 어떤 마음으로 나를 바라봐 주시고, 어떤 마음으로 아이들을 바라보시는지를 알아 가는 기쁨이 크거든요. 그래서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이 일을 못 놓겠더라고요.
이 시대 학생들의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갈 바를 모른다는 거예요. 제가 온라인상으로는 그야말로 불특정 다수의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지만, 이곳에 오는 아이들 중에는 학구열이 높은 대치동 아이들도 있거든요. 그런데 그 아이들 가운데 가정이 화목하지 않은 경우가 참 많아요. 그리고 또 요즘에는 사회성이 떨어지는 친구들도 많죠. 내가 왜 혼나는지, 왜 친구들이 날 기피하는지를 모르는 아이들이 정말 유독 많단 말이에요. 내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고 있고 내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모르는 이 아이들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의 백성들을 바라보며 ‘갈 길을 잃은 양’과 같다고 말씀하시며 눈물을 흘린 장면이 생각나요. 예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평안이 내려오면 이 아이들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빌립보서 4:13) 무엇이든 할 수 있거든요. 우리 예수님이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가치가 ‘동행’이잖아요. 이 아이들과 동행하며 따뜻하게 대해 주면 인간답게 살아갈 텐데, 현실이 그렇지 못하니까 너무 마음이 아파요.
그런 의미에서 곧 새 학기를 맞는 아이들에게 한 말씀 해 주신다면요.
하나님이 너희에게 원하시는 건 단 한 가지야. 바로 너희들과 친해지는 것. 그러니까 너희도 하나님과 친해지는 것만을 원했으면 좋겠어. 그러면 나머지 것은 하나님께서 덤으로 주실 거야. 하나님의 눈물이 있는 곳을 위하여, 그곳의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그 영역을 살리기 위하여 공부해야 해. 인간의 죄로 인해서 쓴물이 된 영역을 단물로 만들기 위해,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너희가 되길 기도한다.
끝으로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고난’의 의미를 듣고 싶어요. 하나님을 알고 믿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락되는 고난의 역설에 대해서요.
제가 겪은 고난은 물론이고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겪는 고난을 생각하면, 사실 저는 이 세상이 매우 고단하고 또 서럽게 여겨지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내가 죽어 하나님을 뵈었을 때 하나님이 “보람아, 어땠어?”라고 물어보시면 저는 “진짜 너무 즐거웠습니다”라고 답할 것 같아요. 많이 힘들었지만, 지나고 보면 그 고난을 통해서 성장해 있었고 그 고난으로 인해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고, 무엇보다 가장 큰 보물인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었거든요.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인데, 이 땅에서 고난을 겪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게 되었고 버려진 자들과 가족이 될 수 있었으니까요. 그것만으로도 내가 얻은 이득이 크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진정한 행복이라는 것을 이제 알기 때문에 고난은 제게 값진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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