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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러진 그곳에서


Guideposts 2026 | 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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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ideposts 2026 | 05

내가 쓰러진 그곳에서


‘여기까지’라고 여겨지는 막다른 길, 그것은 새로운 인생의 국면으로 접어드는 출발선이기도 하다. 28년 전, 이십 대 청년 안성빈은 전신마비라는 막다른 길 앞에 섰다. 생의 벼랑으로 내몰리는 가혹한 선고 앞에서도 그는 까마득한 허공을 향해 온몸을 던졌다.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끝까지 나아간 용기, 두 날개의 힘찬 날갯짓이 그를 붙들었다. 마침내 그는 5년간의 사투 끝에 자립을 선언하고, 20년에 걸쳐 휠체어를 타고 전 세계 유적지를 탐방했다. 장애인에게 복음을 전하며 소외된 이들의 삶 곳곳에 사랑을 흘려보내는 안성빈 목사(그루터기교회 담임목사, 로이사랑나눔회 대표), 그는 오늘도 하나님 안에서 소망의 날갯짓을 하고 있다.







꿈 많던 청년 시절, 돌연히 전신마비라는 가혹한 시련을 맞닥뜨리셨습니다. ‘끝’이라고 여겼을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엮는다면, 어떤 제목을 붙이고 싶으신가요?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그 내용으로 쓰고 있는 글이 있어요. 아직 미완이지만 제목도 정했죠. 옛날 찬양 제목이기도 한데요, 바로 ‘내가 쓰러진 그곳에서’입니다. 제가 2000년 초반에 퇴원한 뒤 집에 누워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 큰 힘이 되었던 곡이에요. 제가 그 곡으로 찬양 콘테스트에서 상을 받기도 했거든요. 그 파일을 다시 열어 본 지가 벌써 몇 년이 되었는데(웃음) 언젠가는 마무리해야죠.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통과한 과정인 만큼 그 책이 출간되면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전신마비가 된 1998년 이후 약 5년간의 인고 끝에 새로운 인생의 장을 여셨는데요. 전환점이 된 사건이 있다면 나누어 주세요.


2004년 11월 무렵, 저의 아버지가 암 판정을 받으셨어요. 당장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아야 할 상황이었는데, 저를 수발해야 했던 아버지는 입원을 망설이고 계셨죠. 당시 아버지가 저의 수족이 되어 대소변을 비롯한 일상의 모든 부분을 도우셨거든요. 저로 인해 수술도 미루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정말 마음이 아팠어요. 제가 쓰러졌을 때보다 더 아팠죠. 남들은 자식이 병든 아버지 수발을 든다는데, 정작 우리 아버지는 나로 인해 병원에도 못 들어가시는구나 싶어서요. 무얼 어쩌지 못해 힘든 시간을 보내던 중 한 줄기 빛을 발견했어요. 저의 모 교회 전도사님이 솔깃한 제안을 주신 거예요. “성빈 형제, 내가 매월 소정 금액을 후원할 테니까 이참에 집에서 나와서 혼자 살아 보는 건 어때요?” 때마침 그즈음 장애인 활동 지원 제도가 시범 사업 중에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죠. 한번 해 보고 싶다는 용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리하여 2005년 2월, 독립을 했어요. 감사하게도 전도사님의 월 후원금 덕분에 오피스텔 월세를 낼 수 있었죠. 그게 저에게는 큰 전환점이었어요.



누군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상황에서 독립을 결정하신 것이 존경스럽습니다. 독립 이후 일상 전반이 크게 바뀌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적응하셨나요?


당시 활동 지원 서비스를 월 60시간 이용할 수 있었어요. 하루에 2시간씩 이용하는 셈이죠. 그러니까 활동 지원사가 없는 22시간은 저 혼자 있는 거예요. 교회 근처에 오피스텔을 얻은 덕분에 교회 선후배와 친구들의 도움을 수시로 받긴 했지만, 혼자 방치되는 시간이 많았어요. 밤중에 대변이 나와 있는데도 바로 치울 수가 없어서 다음 날 아침에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경우도 많았고요. 그런데도 마음은 편하고 행복했어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한테 짐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좋았던 거예요.

한편, 독립 이후로 하는 일이 많이 늘어났어요. CCM 콘테스트 수상 이후로 본격적인 찬양 사역을 시작했거든요. 당시 위성 방송의 작은 채널을 6개월 동안 진행하기도 하고,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도 출연했죠. 아버지가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저는 계속 아버지의 돌봄을 받으며 지냈을 테고, 저의 독립이 그리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저의 부모님은 ‘내 아들은 내가 돌봐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시거든요. 그래서 섣불리 독립을 못 했을 것 같아요. 독립이 늦어졌다면 저의 활동이나 사역도 쉬이 열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게 되더라고요.



담담하게 말씀하시지만, 숱한 고충 가운데 몹시 힘겨우셨을 것 같습니다. 당시 목사님을 살린 한마디가 있다면요?


당시 저의 모 교회 부목사님이 저를 찾아오신 적이 있어요. 간경변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사역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가기로 결정했다고 하시더군요. 미국 가기 전에 꼭 성빈 형제를 만나 보고 싶었다면서 저에게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으셨어요. 신학생이던 이십 대부터 사십 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사역을 해 왔지만, 여태껏 성도들의 마음을 모른 채 사역을 했다는 고백이었어요. 병을 앓으며 관계의 단절과 배신 등을 겪고 철저한 고립과 외로움을 느껴 보니, 그동안 환자의 마음을 모르고 심방을 다녔다는 깨달음이 왔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 말씀을 남기셨어요. “성빈 형제, 우리는 지금 터널을 지나가는 거예요. 끝이 있어. 끝은 뚫려 있어. 지금은 끝이 안 보이지만, 과연 끝이 뚫려 있을까 싶지만, 끝은 뚫려 있어요. 이곳은 동굴이 아니야. 그러니까 성빈 형제, 조금 더 인내하고 힘냅시다. 이 말 하려고 왔어요.” 그 말이 당시에 정말 큰 힘이 됐어요.

그 한마디가 목사님을 다시 일으켰군요. 그 후 하루하루 일상을 지켜 가도록 곁에서 돕는 분들도 많았을 텐데요. 특별히 감사한 분은 누구인가요?


모 교회 청년부 동기 중 이범승 집사가 항상 힘이 되어 주었어요. 매 주일 교회 갈 때 또 다른 형제 한 명을 데리고 와 저를 업어서 본인 차에 태우고 교회에 갔죠. 예배 마치면 또 저를 업어서 차에 태워 집에 데려다주었고요. 이런 과정을 매주 했어요. 그뿐만 아니라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자기 일처럼 돕고 챙겨 주었죠. 그런 친구가 있어서 더 힘을 낼 수 있지 않았나 싶어요. 또 현재 저랑 같이 협력하고 있는 박훈 목사도 참 고마운 친구예요. 청년부 2년 후배인 그 친구는 제가 어디 간다고 하면 늘 시간 내어 데려다주었어요. 2층이든 3층이든 저를 업어서 오갔죠. 

그 덕분에 두 사람이 가장 고맙고 기억에 남네요. 모든 게 단절되어 정말 외로운 순간이었는데, 제가 뭐라도 하겠다고 하면 무엇이든 시도해 볼 수 있게 도와주었어요. 본인들의 시간과 돈을 다 써가면서요. 그 덕분에 CCM 콘테스트도 나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만날 수 있었죠. 그런 고마운 사람들이 있어서 제가 그 시기를 헤쳐 나올 수 있었어요.



CCM 콘테스트에 도전하실 정도면 찬양에 대한 갈망이 깊으셨던 것 같아요. 한 시인과의 교제를 통해 찬양 사역을 소망하게 되셨다고요.


2000년 초에 송명희 시인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글로 교제를 시작해 친해졌어요. 어느 날 누나가 저에게 묻더라고요. “성빈아, 너 찬양하는 사람이 되면 어떻겠니?” 제가 이렇게 답했죠. “아휴, 누나. 내가 지금 방에 누워서 꼼짝도 못 하는데 무슨 찬양하는 사람이야. 나 혼자 대소변 처리도 못하고 있는데….” 그러자 누나가 이러더라고요. “아니야. 나는 네가 찬양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어. 너는 가슴으로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이 됐잖아.” 그 말에 제 마음이 움직였어요. 당시에는 크고 작은 CCM 콘테스트가 많았어요. 그래서 수시로 공지를 확인하고 준비해서 몇몇 대회에 참가했죠. 그중 한 대회에서 수상을 하게 되었고요. (책장에 놓인 액자를 보며) 저 사진이 제가 찬양 사역하던 시절의 사진이에요.(웃음) 사진 속의 사람들은 함께 활동하던 찬양팀이죠.



좋아하고 사모하던 찬양을 할 수 있어 무척 행복하셨겠습니다. 목사님에게 가장 위로가 되었던 찬양은 무엇인가요?


제가 간증할 때 자주 부르는 찬양인데요. ‘나의 안에 거하라’예요. 제가 꼼짝도 못 한 채 방에서 누워만 지낼 때, 어쩌다 벌레가 기어가는 걸 보면 그 벌레를 참 부러워하곤 했어요. 저 벌레는 가고 싶은 곳 마음껏 가고, 먹고 배설하는 것도 혼자 다 하는데 나는 이게 뭔가 싶었죠. 나 자신이 처량하고 한없이 작아 보이던 그 시절, 이 찬양 가사의 ‘지명’이라는 단어가 크게 와닿았어요. ‘지명’은 한 무리를 통틀어 부르는 게 아니라, 손가락으로 정확히 가리키면서 부르는 것이잖아요. “얘, 너, 안성빈!” 이렇게요. 하나님이 이런 나를 지명하여 부르시는구나 싶어 큰 힘이 됐죠. (찬양을 부르며)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의 하나님이라.” 이게 제 간증의 주 레퍼토리였어요.



(손뼉 치며) 직접 찬양을 들려주시니 더욱 은혜롭습니다. 목사님의 찬양의 은사만큼이나 놀랍고 감탄스러운 점이 있는데요. 2005년부터 2025년까지 11개국 37개 도시를 여행하셨다고요.


2005년 5월, 장애인 단체 연수 프로그램을 통해 일본에 가게 되었어요. 단체로 견학도 하고, 교류 활동을 한 뒤 돌아왔죠. 한번 시도해 보니 가능하더라고요. 그때부터 TV를 보다가 관심 있는 나라가 나오면 ‘가고 싶다. 직접 가서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하게 들었어요. 여행 프로그램은 모두 비장애인들이 참여해 촬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장애인 편의시설이라든가 장애인을 위한 정보는 전혀 제공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더욱 주의 깊게 관찰했어요. 건물에 들어가는 장면에서는 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살피고, 버스 타는 장면에서는 저상 버스인지 아닌지를 살피고…. 내가 실제로 여행할 수 있는 곳인지를 살피는 습관이 생긴 거예요. 그러다가 ‘휠체어로 세계로’라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발견했어요. 지금은 돌아가신 이일세 대표님이 직접 여행했던 곳들을 정리해서 올리신 카페예요. 그분도 저처럼 전신마비 장애인이었죠. 그분의 행적을 보면서 ‘저분이 간 곳만 따라가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직접 가 보자고 결심하고 실행에 옮겼죠.

그 결단과 도전이 놀랍습니다. 여행 중 여러 어려움을 겪으셨을 텐데 어떻게 타개해 가셨나요?


일단 비행기 좌석에 앉기까지의 절차가 만만치 않아요. 항공사 직원 두 명이 와서 저를 기내 휠체어에 태워 좌석까지 가서 저를 들어 앉혀야 하니까요. 저가 항공사는 인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저처럼 타인의 도움이 전적으로 필요한 사람은 이용할 수 없어요. 우여곡절 끝에 좌석에 도착했다 해도, 기내에서 오랜 시간 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욕창 문제, 화장실 문제 등이 발생하죠. 기내 화장실은 무척 작아서 누군가 들어 앉혀 줄 수가 없어요. 어렵사리 여행지에 무사히 도착하면 그다음부터는 교통수단이 문제가 되죠.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염려 때문에 여행 결심을 못 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그런 어려움을 하나하나 해결할 수 있더라고요. 

저는 그 여행 카페를 통해 용기를 얻어 그 정보들을 온전히 활용했죠. 물론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도 현지에서 변수가 생겨요. 다만 저는 다른 사람보다 도전을 어려워하지 않는 편이기도 하고, 예상을 벗어난 의외의 상황을 만나도 크게 낙담하지 않는 편이라서 변수들을 무난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설마 내 휠체어 들어갈 식당 하나 없겠어? 없으면 그냥 바깥에서 먹으면 되지.’ 이런 각오로 하나하나 도전했던 거죠.



목사님 내면의 긍정 에너지와 도전 의식 덕분에 여행이 가능했군요. 목사님의 삶에서 여행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요?


그토록 가 보고 싶던 장소에 가면 몹시 행복하더라고요. 유럽의 노천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내가 여기에 와 있다니…’ 하는 생각에 몹시 감격스러웠어요. 이전부터 동경해 오던 곳들을 실제로 가 보자 싶어서 2019년부터는 유럽 박물관 투어를 했어요. 어렸을 때부터 대영박물관, 루브르박물관 등을 가 보고 싶었거든요. 백과사전을 보면 자료 사진 하단에 소장처가 적혀 있잖아요. 대부분 소장처가 대영박물관이나 루브르박물관이더라고요. 백과사전에서 보았던 작품들을 직접 마주하니 말할 수 없는 희열이 느껴지고 가슴이 벅차올랐어요. 오랜 시간 동경하며 가 보고 싶던 그 자리에 내가 가 있는 것, 그 자체가 큰 선물이었죠. 저는 여행을 통해서 자신감을 얻었어요. 정말 힘들 거라고,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도 할 수 있구나. 하나하나 부딪혀 보니까 되는구나’ 이런 자신감이 생겼죠. 자존감도 높아졌고요.



여행을 다녀온 것으로 끝내지 않고 「에이블뉴스」를 통해 ‘휠체어 세계 칼럼’을 연재하시고, 이후 『휠체어로 세계 속으로』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하셨어요.


제가 이일세 대표님으로부터 도전을 받았던 것처럼 누군가는 저로 인해 도전을 받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칼럼을 쓰기 시작했고, 책도 내게 되었죠. 2024년 11월에는 바르셀로나를 또다시 방문했는데요. 그 여정을 영상으로 찍어 저의 유튜브 채널에 올렸어요. 칼럼 쓸 때도 종종 메일을 받았는데, 동영상을 올려놓은 뒤에도 간혹 연락을 받아요. 제가 유명인은 아니니까 제 책이 많이 팔리거나 저의 영상이 많은 이들에게 노출되지는 않겠지만 그 정보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 그 한 사람에게 나침반이 되면 좋겠어요.



목사님이 앞서 내신 길 덕분에 많은 이들이 용기와 힘을 얻을 것 같습니다. 현재 그루터기교회와 로이사랑나눔회를 섬기며 영혼의 길을 내고 계신데요. 사역을 시작하면서 품은 소명은 무엇이며, 그 소명을 어떻게 이루어 가고 계신지요?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사실 저는 이렇다 할 소명을 품지는 않았어요. 그저 한 걸음 한 걸음, 당장 내가 할 일을 해 나갔더니 이렇게 된 거죠. 저는 우리 장애인들도 이 변화무쌍한 세상 속에서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야 할 성도임을 가르치고 싶어요. 장애인은 동정과 시혜의 대상이 아닌데 교회에서조차 장애인들을 도와줘야 할 대상, 챙겨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 안타까워요. 장애인들도 함께 어울려 예배하고 신앙생활 하는 성도라는 점을 기억해 주시면 좋겠어요.

저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는 말씀을 품고 지내요. 저를 비롯해 그루터기교회가 즐거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우는 교회가 되기를 늘 기도하고 있어요. 저희 그루터기교회가 올해 11주년을 맞았는데요. 성도 7명의 전동 휠체어가 겨우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좁은 공간이지만, 매 주일 함께 웃고 울며 예배합니다. 외부의 손길로부터 꾸준히 후원과 사랑을 받는 만큼, 저희 또한 받은 물질의 일부를 도움이 필요한 곳에 흘려보내고 있어요. 로이사랑나눔회에서는 장애인 문화예술 지원 및 소외계층 후원 등을 진행하고 있고요. 이를 통해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울라는 말씀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는 공동체가 되길 소망합니다.

귀한 사역에 끊이지 않는 공급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세월 가운데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은 것을 타임캡슐에 묻는다면 무엇을 선택하고 싶으신가요? 그중 ‘성령의 열매’도 한 가지 포함한다면요?


제가 죽고 난 다음에 타임캡슐에 담는다고 가정한다면 휠체어를 넣고 싶어요. 제가 천국에서 휠체어를 보면 많은 생각이 들 것 같거든요. 어느덧 제 인생의 절반인 27년 동안 휠체어를 타고 지내 왔어요. 이제는 꿈을 꿔도 제가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나올 정도로 자연스럽죠. 휠체어를 빼고는 나를 설명할 수 없으니 휠체어를 묻고 싶어요. 성령의 열매 중에서는 ‘오래 참음’을 포함하고 싶네요. 하나님께서 이 부족한 사람을 목회자로 세워 더 오래 참을 수 있게 만들어 주셨거든요. 나 같으면 이런 사람 목사로 안 쓸 텐데, 하나님은 끈질기게 저를 다듬고 깎아 가면서 오래 참음의 열매로 저를 이끌어 가시는 걸 느껴요.



뜻밖의 장애로 고통 가운데 계신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씀을 나눠 주세요.


장애를 입은 지 얼마 안 되어 희망을 다 잃은 듯한 분들을 종종 만나곤 하는데요. 그런 분들을 보면 과거의 제 모습이 보이더라고요. 그분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해요. “분명히 할 수 있는 게 생길 겁니다. 또 하고 싶은 일도 생길 겁니다. 그러면 하고 싶은 일을 반드시 할 수 있을 겁니다.” 저 역시 이런 일을 하고 살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요. 장애 판정을 받은 스물여섯 살 때는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했어요. 하지만 마음대로 죽을 수조차 없는 몸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온 것 같아요. 아마 그들도 그럴 거예요. 그러나 ‘분명히 길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절대로 희망을 놓지 말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내가 뭘 하면 좋을까’를 많이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분명히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길이 열릴 거예요. 분명히, 분명히 열릴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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